사사기 1:1-3:6
사사기는 여호수아서와 함께 다뤄져야 하는 한 세트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1장과 2장은 여호수아서에서 등장했던 내용들이 겹칩니다. 영화의 페이드인 아웃 효과처럼 앞의 장면은 흐릿해지면서 겹쳐진 새로운 장면이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듯이 본문이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런 효과를 문학적으로 의도하면서 여호수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백성들이 믿음으로 성취했던 상승 분위기에서 여호수아의 걱정대로 믿음을 상실하는 하강 분위기로 바뀌는 것을 표현합니다.
1장은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과 싸우기 위해 하나님께 여쭈었고, 하나님께서는 유다 족속을 지시하셨습니다. 유다는 시므온 족속과 함께 남방 족속을 토벌하러 갔는데, 베섹을 거쳐 헤브론과 드빌과 스밧의 호르마까지 통과하며 가나안 족속을 전멸시켰습니다. 그중 드빌에서의 싸움 때는 그 전투를 주도하는 유다 족속의 땅에 거주하던 갈렙이 옷니엘을 통해 드빌을 쳤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호수아 15장에 등장했었는데 여기서 반복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만족스럽게 진행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6절에서 유다 족속이 적들의 신체 말단부를 잘랐던 방법은 가나안인들의 전쟁 풍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가나안 족속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18절을 보면 계속해서 유다는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 지역들과의 전쟁 초반에는 승리했지만 그들에게 철병거가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철병거가 강해서였는지 철병거를 만드는 기술을 얻으려고 가나안 족속을 살려두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또 21절에서 베냐민 자손도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고, 22절에서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는 과정에서 그 성읍사람에게 협조하면 살려주겠다고 해서 그 가족을 살려주었는데 그들이 다른 곳에 가서 성읍을 이뤘습니다. 27절에서 므낫세 족속은 벧스안, 다아낙, 이블르암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았는데, 그들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했습니다. 29절에서 에브라임 족속은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고, 30절에서 스불론 족속은 기드론과 나할롤 주민들을 쫓아내지 않고 노역을 시켰고, 31절에서 아셀 족속은 악고와 시돈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했고 아예 그 땅의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했습니다. 33절에서 납달리 족속도 벧세메스와 벧아낫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들 가운데 거주했습니다. 34절에서 특이하게 이번에는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붙이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스라엘 각 족속들이 가나안의 남은 족속들을 치는 과정에서 뒤로 갈수록 어떻게 된 것 같습니까? 갈수록 이스라엘이 흐지부지하고, 오히려 가나안 족속이 다시 힘을 얻으면서 자신들의 것을 주장하고 이스라엘을 몰아붙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앞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족속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살려놓은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 중에 거주했는데 뒤로 가면 아셀 족속과 납달리 족속은 거꾸로 자기들이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했습니다(32-33절). 이렇게 실망스런 실패가 연쇄적으로 나타나고, 게다가 뒤로 갈수록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작은 타협이 점점 커져서 결국 이스라엘은 주객이 전도되었습니다. 여호수아 때 얻었던 주도권을 잃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쇠락의 길을 가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부터 가나안 땅을 주신 은혜까지 이스라엘이 다시 기억하게 하셨고, 계속해서 가나안 주민과 언약을 맺고 그들의 신을 섬기면 그들이 고통을 줄 것이라고 다시 일러주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소리 높여 울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말 달라졌을까요?
6절에서 여호수아의 죽음이 또 다시 언급되고 여호수아가 살아있을 때와 달리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린 행위를 극명하게 대비시키고는 11절부터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린 일들이 무엇인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우상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살려둔 가나안인들에 의해 고통을 겪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실 때는 가나안 족속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다는 표현을 자주하셨는데 이번에는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셨다고 14절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불순종 때문에 괴로움을 당합니다.
그래서 16절부터는 사사기의 이야기 구조가 소개됩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울부짖으면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셔서 구원하시지만 백성들은 또 다시 타락하고 그것이 자꾸 반복되는 구조입니다. 그런 반복 속에서 하나님은 남은 가나안 족속들을 사용하셨습니다. 2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또 3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라고 말하고, 4절에도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언제나 이미 아십니다. 그런데 본문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셨다는 것,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궁금하셔서가 아니라 사람의 신앙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상태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시험으로 괴롭게 내버려두시지만 않고 은혜로 구원하셔서 하나님을 알고 순종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신앙적 실패를 반복했습니다.
그런 신앙적 실패의 원인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그것을 확보하기 위한 자신들의 판단이 더 지혜롭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보다 가나안 사람을 살려두어 이용하는 것이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생각을 좋게 여긴 것입니다. 자신들이 판단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이 “사사”가 판단자, 재판관이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등장하는 여러 사사들이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지도자의 역할을 하지만 그 사사들의 배후에는 진정한 판단자, 유일한 왕이신 하나님이 항상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가나안족속과 인간 사사들을 통해 진정한 사사이신 하나님 자신의 판단이 인간의 판단보다 우위에 있고, 진정한 살 길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것임을 계속 가르치신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진보해도 그 하나님의 말씀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때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도 언제나 동일하게 살아계신 분임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만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이 그렇습니다. 부모가 그런 시행착오를 줄여주려고 자신의 역사를 아무리 가르쳐줘도 인간은 자기가 경험해봐야 철이 듭니다. 부모의 말, 성경의 옛 말씀보다 가나안 같은 세상 방식이 매력적으로 보이고, 이 세상에는 뭔가 새롭고 엄청난 일들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토대로 판단하는 것이 똑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역사를 통해 배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실수가 늘 반복됩니다. 나중에 동일한 실패를 맛보고 고통을 겪어야 그 때 흘려들었던 말씀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전환점이 있을 때까지 더욱 악화됩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은 모든 세대에게, 각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주어집니다. 구약 때에도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구원이 반복되었고 지금도 그런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각 성도 안에서 구원의 반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전의 성도들을 다루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고 계시고, 우리 자녀들도 다루실 것입니다. 구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 이 나라의 다음 세대들이 동일한 시행착오 속에서 고난을 당하며 구원을 얻기를 기대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뻔히 인간들을 아시면서 반복해서 기억시키시고, 경고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실패할 제자들을 아시면서도 계속 가르치시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먼저 겪은 자들이 다음에 겪을 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그것입니다. 그들이 동일한 하나님의 다루심을 겪더라도, 뻔히 예상되는 것이 있어도 2장 19절이 말하는대로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리 목적으로 설교를 스크랩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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