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4-5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이스라엘의 범죄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반복이지만 그것을 다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하심은 항상 새롭고 독창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옷니엘, 에훗, 삼갈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지만 그들은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가나안 하솔의 왕 야빈의 손에 이스라엘이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야빈은 여호수아 11장에 등장했던 이름입니다. 야빈의 군대는 그 수가 엄청나서 해변의 모래와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그들을 멸하셨습니다. 그때 야빈은 죽었는데, 본문의 야빈은 동일한 왕호를 사용했던 그 후대 왕입니다. 이제 가나안 족속들은 야빈의 주도로 동맹을 맺어 이스라엘을 공격할 만큼 세력을 회복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죽었던 야빈과 동일한 왕호를 사용하는 새로운 야빈이 나타났을 때 죽었던 자가 다시 좀비처럼 살아난 것 같은 끔찍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야빈은 시스라라는 장관을 통해 군대를 움직였고, 그 압제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십 년을 괴로워 하다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사를 세우셨는데, 바로 여자 사사 드보라입니다. 드보라는 바락을 불러서 야빈의 장관 시스라와 싸우게 합니다. 그런데 바락은 드보라가 전쟁터에 동행하기를 요청합니다. 드보라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만 적장 시스라를 쓰러뜨릴 영광을 다른 여인에게 빼앗길 것이라고 바락에게 말합니다. 드보라가 말한대로 다른 여인 야엘이 적장 시스라를 없애고 영광을 얻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락이 큰 잘못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어지는 5장의 노래는 사실 드보라의 노래인데 본문은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라고 기록하면서 바락의 존재를 계속 중요하게 남기기 때문입니다. 또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을 말하면서 드보라를 언급하지 않고, 바락을 언급합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군대가 나타나자 가나안 시스라의 군대가 철병거를 이끌고 기손 강가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시스라의 군대를 혼란에 빠지게 하셨습니다. 5장 20-21절을 보면 별들과 기손 강이 시스라의 군대와 싸웠다고 말하는데, 아마도 하나님께서 갑작스런 비를 내리셔서 철병거, 즉 바퀴달린 전차가 진흙탕에 묻혀 무용지물이 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시스라의 군대는 쓸모없는 철병거를 버리고 도망치다가 이스라엘에 전멸 당했고, 시스라는 혼자 살아남습니다.
그는 야엘이라는 여자의 장막에 숨어들었습니다. 야엘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라고 소개되고 있는데, 그런 이름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사람입니다. 게다가 야엘의 집은 야빈과 친분이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스라는 야엘이 당연히 자기편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야엘도 처음에는 시스라를 잘 보살펴주고 안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야엘은 시스라의 이마에 말뚝을 박아 죽입니다. 그렇게 시스라와 그의 군대는 인간적으로 기대하고 의지했던 것들에 뒤통수를 맞으며 패배했습니다. 철병거가 그렇고, 야엘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다시 구원하셨습니다.
이어서 5장은 드보라와 바락이 함께 노래인데, 2-5절은 승리를 주신 여호와께 초점이 맞춰져 있고, 6-7절은 가나안의 압제 아래에서 위축된 이스라엘과 드보라 자신이 구원자가 된 것을 말하는데 드보라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어머니”라고 표현합니다. 8-13절은 용사들이 드보라와 바락에게로 와서 헌신한 것을 말하고, 14-18절은 죽음을 무릅쓰고 함께 한 지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지파도 있음을 비판합니다. 19-23절은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시스라의 군대를 혼란케 하셔서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을 말하고, 24-26절은 야엘이 시스라를 죽인 공로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28-30절은 시스라가 그렇게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는 시스라의 어머니가 아들이 늦게 오는 것을 걱정하는 것을 가상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거기서 시스라의 어머니와 그 시녀들은 시스라가 늦게 오는 이유가 전쟁에 이겨서 그 승전물을 즐기는 것 때문이라고 맞장구를 치지만, 곧 그들은 슬픔에 빠지게 될 것을 상상하며 조롱한 것입니다. 그렇게 시스라의 어미는 아들을 잃지만 이스라엘의 어미인 드보라는(7절) 아들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새로운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드보라를 통해 전쟁을 시작하셨고 야엘을 통해 마무리 되게 하셨습니다. 본문 이야기의 처음과 마지막에 여성들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 드보라를 하나님의 선지자, 사사로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점이 어떤 지파들에게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을 핑계거리로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여성에 대한 편견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판단하기에 좋은 구원자가 아닌 의외의, 이상한, 인정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잠깐 언급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대에 어긋난 자들, 자랑스럽지 않은 구원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왼손잡이 에훗이었고, 엉뚱하게 소모는 막대기를 무기로 사용한 삼갈이었고, 여자 드보라와 야엘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사들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불순종했는데, 하나님은 결격 사유가 있는 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에 구원을 베푸심으로 꼭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가 있어야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되었든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 탐탁지 않은 사사들이지만 이스라엘은 그 사사들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를 보며 그들을 따랐습니다. 그 이유는 고통에서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짜 지도자이신, 사사이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사사기에서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 21장)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에 정말로 왕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을 백성들이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사들을 통해 이기적으로 자신들의 문제는 해결 받고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사기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인간의 기대에 어긋난 자들, 오히려 이스라엘을 난처하게 만드는 구원자들을 보내십니다. 그런 사사들에 비하면 앞에 등장하는 에훗, 삼갈, 드보라는 인간의 고정관념을 불편하게는 단점들을 가졌지만 그래도 양호하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갈수록 이상한 사사들을 등장시키셨을까요? 이스라엘이 반복적으로 죄를 짓고, 구원을 계속 경험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고, 힘들면 부르짖지만 하나님이 자신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을 본성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난,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 구원자를 맨 나중에 보내십니다. 사사시대를 지나서 구약 시대를 지나서 한 사람을 보내십니다. 그게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기대에 가장 어긋난, 자랑스럽지 않은 구원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제자들도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힘들어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나오는 대로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왕이신, 진정한 사사이신 그분에 대한 인간들의 태도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육체적 고통에서 구원받기 위해 인간적인 단점이 있는 사사여도 인정하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흠이 없는데도 유대인들은 그분을 구원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진정한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분인데도 그랬습니다.
자랑스럽지 않은 사사들을 통해 온전한 사사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줄 사람들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도구가 되게 하십니다. 모순이 있는 부모일지라도, 흠이 있는 목회자일지라도 그들의 불완전함을 통해 진정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도는 사람을 탓하면서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합리화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탐탁지 않은 예수님이 우리의 영광스런 구원자가 되시는 것처럼, 구원받는 자는 사람의 관념과 본성을 불편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 속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보며 감탄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열심을 보며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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