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7-18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본문은 시간상 삼손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고, 반대로 사사시대 초기에 있었던 일들로써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의 부패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가 등장하지 않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두 이야기 모두 레위인이 각각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 앞의 이야기는 종교적인 부패를 말하고 있고, 뒤의 이야기는 윤리적인 부패를 말하는데 이 두 가지는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 중 앞의 종교적 부패에 대한 내용을 살필 것인데, 문장 하나하나가 등장인물들이 제멋대로 저지른 비정상적이고 황당한 일들의 연속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미가라는 사람이 어머니의 돈 은 천백 개를 훔쳤다가 어머니의 저주를 듣고 자백을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돈을 찾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아들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을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찾은 돈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린다고 말하고는 그중 은 이백을 들여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아들 미가는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서 그것들과 함께 신상을 자신의 신당에 두었습니다. 또 미가는 아들 중 하나를 마음대로 제사장으로 세웠었다가 제사장 족속인 젊은 레위인을 만나자 그를 자기 집의 제사장으로 고용합니다. 미가는 제사장까지도 정통성 있는 진짜 레위인으로 세워서 신당을 제대로 갖춰놨으니 여호와께서 복 주실 거라 기대하고 좋아했습니다.
이번에는 단지파가 등장합니다. 18장 1절을 보면 그들이 기업인 땅을 분배받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해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정 받은 땅에 가서 싸우지 않아, 즉 순종하지 않아 땅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단 지파는 다른 땅을 알아보려고 정탐꾼을 보냈고, 그러던 중 미가의 집에서 머물다가 제사장으로 고용된 레위 청년을 알아보게 되고,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아봐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그 젊은 레위 제사장은 너희의 가는 길이 여호와 앞에 있다고 듣기 좋은 말을 합니다.
미가의 집을 떠난 정탐꾼들은 라이스라는 곳에 이릅니다. 7절을 보면 라이스 사람들은 염려 없이 평온하고 안전하고 부족한 것이 없고 다른 족속과 상종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데 그것은 그들이 약탈을 일삼지 않고 중립적인 자세를 가지면서 선량하고 평화롭게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그런 라이스를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넘겨준 땅이라고 멋대로 생각하고(10절) 공격하기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의 땅을 주신 이유는 단지 이스라엘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가나안인들의 악을 심판하시고자 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라이스 사람들의 평화롭고 선량한 모습을 7절에서 언급하고 단 지파의 공격을 받은 후 27, 28절에서도 또 언급한 것은 라이스 사람들이 다른 가나안 족속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한 족속이 아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단 지파가 여호수아를 통해 지정받은 족속은 멸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만만한 선량한 족속을 마음대로 멸했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했음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단 지파가 라이스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또 어떤 일을 저질렀는가 하면 앞에서 정탐할 때 머물렀던 미가의 집에서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훔쳐 갑니다. 그 때 이전에 만났던 젊은 레위 제사장이 막으려고 하자 단 지파 사람들은 입을 다물라고 협박하면서(19절) ‘미가라는 한 집안의 제사장으로 남아 있을거냐 우리를 따라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될 것이냐’하고 물으며 주인 미가를 배신하도록 회유합니다. 그러자 그 레위 제사장은 더 나은 조건이 좋아서 단 지파를 따라갑니다. 미가가 그 사실을 알고는 단 자손을 쫓아갔지만 단 자손들은 강도질하는 주제에 미가를 위협하고(25절) 미가는 두려워서 꼬리를 내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죄를 지은 아들 미가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한 그의 어머니, 자기 멋대로 제사장을 고용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한 미가, 라이스 땅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한 단 지파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과 찬양을 자신들이 하려는 일을 정당화하고 포장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본문에는 하나님을 우상 취급하고, 서로의 죄를 지적하고 인정하기보다 도리어 칭찬을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도 아니하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종합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는 없고 그저 자신의 이익과 편리에 따라 판단하고 합리화하는 태도에 대해 본문 17장 6절과 18장 1절은 반복해서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 왕으로 계시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없이 형식으로 굳어진 종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지 않을 때 양심의 거리낌을 덜기 위해서 외적인 형식만을 더욱 강화해 갑니다. 해야 할 일이 매뉴얼화 됩니다. 마치 고객에게 정해진 대로 서비스를 하면서 대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도 동일한 일이 발생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분의 다스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순종하기보다 하나님에 관한 종교를 자신들이 조작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어떤 것을 누리려고 할 때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이고, 결국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지배당함이 다른 거짓 종교나 돈과 쾌락을 좇는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 교회 안에도 일어난다는 것을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미가와 레위 제사장과 단 지파는 분명 입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그저 욕망을 위한 수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행하고 있지만 실상은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 어느 시대에나 일어납니다. 매슬로우라는 학자가 인간의 욕구 1단계를 생리적 욕구, 2단계를 안전의 욕구, 3단계를 사회적 욕구, 4단계를 자기 존중의 욕구, 5단계를 자아 성취의 단계라고 말했는데 그런 다양한 욕구가 종교 안에서도 추구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생존을 위한 물질과 복을 추구하는 일에서부터 자아를 성취하는 일까지 종교가 사용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들은 재물이나 육적인 것을 추구하는, 쉽게 들통 날 죄를 범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존경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수준 높은 욕망을 채우려고 교회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로는 진짜 복음과 진리를 외칠 수도 있고, 훌륭한 인격과 도덕성으로 감동을 줄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우월함 탁월함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목회를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복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그것을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하면서 숭고한 것을 깨닫는 일을 고상하게 여기고, 그런 교회에 자신이 속한 것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교인들은 자신은 경건하게 살지 않으면서 경건하고 신령한 목사를 옆에 두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불교든 무당이든 교회든 단지 종교의 종류만 달라졌을 뿐이지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 심리적 안정을 찾고, 앞날의 복을 확보하고, 자기를 인정해 주는 편리한 도구를 찾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욕구를 추구하는 수준에서 교회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미가와 젊은 레위 제사장과 단 지파가 각자의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서로 협력했던 것처럼 교회 안에서 각자의 욕망을 위해 암묵적으로 협력하여 악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 얻어 내려는 관심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자 애써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풍성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진실하게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서 교회 생활에만 익숙해진다면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도구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진정 우리가 거룩하시고, 사랑이신 우리의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추구할 권리, 나의 필요는 내가 잘 알고 있다는 판단, 나의 감정은 정직한 반응이라는 착각을 부인하고자 끊임없는 싸움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욕구 실현으로 인생의 보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우리의 가치를 가장 영광스럽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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