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초대교회로 돌아가려면 (행 2:37-47)

따뜻한 진리 2016. 7. 31. 23:01

사도행전 2:37-4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본문은 걱정과 두려움으로 시작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죽인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마음이 찔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사도들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해결책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마치 회개를 해야 죄사함이 주어지는 것처럼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 왜냐하면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즉 사람이 회개하면 그 결과로 하나님의 용서가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 해결책은 베드로가 제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입니다. 모든 인간이 결국 만나게 될 심판이라는 두려운 문제 앞에서 이 세상은 해결책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 세상에 그런 신은 없다고, 죽으면 끝이라고, 심판은 없다고 그럴듯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거짓입니다. 지난 시간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옛적부터 심판에 대한 경고를 끊임없이 하셨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신 없이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보편화되어서 현대인들은 종교가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억압하는 사라져야 할 것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대 과학은 성경과 하나님을 배제시키면서도 종말을 준비합니다. 인류가 지구에서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구와 태양에는 수명이 있고, 또 그 수명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을지라도 인간들 스스로가 지구를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 것임을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에서 그런 종말을 계속 다룹니다. 또 화성으로 탐사선을 보내고 거기서의 생존 실험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가 하는 짓이 무엇입니까? 성경 즉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종말을 향해 갈수록 진리임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데도 인간은 하나님을 배제한 채로, 하나님이 예고하신 것들에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끝과 심판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탄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죄로 인한 고통, 닥쳐올 심판을 해결하고 진정한 변화를 입게 된 것은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복음만이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그 복음으로 인한 변화가 등장합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삼천 명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고, 기도에 힘쓰고,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고, 서로 자기 재산을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아 구원 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멸망할 세상과 자신들을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뿐 아니라 신약 여려 곳에서는 성도의 거듭나기 전과 이후의 중요한 차이로써 세상과의 구별을 중요하게 언급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속하지 않음’, ‘세상의 빛’, ‘세상을 사랑하지 않음’, ‘세상을 이김이라는 표현 등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왜 성도는 세상과 구별됩니까? 세상은 하나님 없는 자기 삶을 원하지만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이 의미하는 대로 세상과 교회는 구별되고 대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41절부터 47절까지의 내용은 그렇게 세상에 속했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구별되어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드러낸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모여 있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애착을 갖고 연대하며 성령 안에서 깊은 교제를 했습니다. 세상 인류가 하나님을 적대시하면서도 생존하려고 강한 연대를 가지는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증거를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 신앙공동체,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은 이전에 속해 있던 그 세상에 더 이상 속할 수 없었고, 속하고 싶지도 않게 된 것입니다. 성장기 때 자기와 잘 통하는 단짝 친구를 만나면 집에 가기도 싫고, 친구와 계속 있고 싶은 것처럼 초대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렇게 모였던 것입니다. 어떤 강요나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46절이 말하듯 마음을 같이하여......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모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42절에 나오는 대로 단지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44, 45절에 나오는 대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소유를 팔아 다른 사람의 필요를 공급해주었습니다. 서로의 일상의 삶을 돌아보며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극적인 변화를 본보기 삼아 진정한 교회라면 초대교회처럼 해야 한다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추구하는 교회나 공동체들이 본문에 있는 대로 충실하게 변화를 이루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다들 본문의 요소 중 어떤 것을 인위적으로 이용할 뿐입니다. 교회 성장을 위해, 교회의 활력을 위해, 헌금을 확보하기 위해 본문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41절처럼 교인들의 숫자는 많이 늘어나는데 46절처럼 기쁨과 순전한 마음이 없고, 47절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세상의 칭송을 받는 일에도 실패합니다. 45절처럼 헌금은 많이 모으지만 각 사람의 필요대로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허튼 일에 낭비하고 재정적 비리를 드러내기 일쑤입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는 그대로 모방하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상적인 교회를 가늠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만약 초대교회의 모습대로 따라하는 것이 옳다면 어느 교회들보다 광적으로 자기들 모임을 중요시해서 가정도 팽개치고, 자기 재산을 전부 헌납하는 이단이 가장 초대교회에 가까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설교에 능력이 있었다거나 교회가 이상적인 천상의 공동체였으니 본받아서 따라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그렇듯 사도행전은 인간들의 활약과 선행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이 현실 세계의 교회라는 영역 안에서 어떻게 실제로 드러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의도한 설교로 삼천 명이 회심한 것도 아니고, 세례를 받은 삼천 명이 이렇게 해야 교회가 성장한다고 협의를 해서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성령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좋아서도, 회개한 사람들의 믿음이 훌륭해서도 아닌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47절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더하게 하신것입니다.

 

    사람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초대교회처럼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까, 위대한 헌신을 이끌어 낼까, 어떻게 선행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까가 아니라 37, 38절이 말하는 대로 우리 자신이 주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 앞에서 우리가 죄인인 줄 알고 마음이 찔렸고, 하나님이 이미 나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증거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한다면, 그 회심이 진정한 것이라면, 성령께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과 세상의 실체를 알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구원하시려는 자기 백성들로 교회를 이루게 하셔서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자라나게 하시면서 그 능력의 주체가 하나님 자신임을 계속해서 보여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