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곁에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구걸하고 있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에게 ‘우리를 보라’라고 말하니 그 사람은 자기에게 돈을 줄 줄 알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한테 돈은 없고 있는 것을 줄 것인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일어나서 걷고 뛰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쫓아다녔습니다.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어 늘 구걸하던 것을 보아왔던 많은 사람들이 그 기적에 크게 놀랐습니다.
2절에서 장애가 있었던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고 밝힌 것은 그 병이 사람이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은 분명 하나님께서 베푸신 표적이었습니다. 치료된 사람의 믿음 때문도 아니고, 12절에서 밝힌 대로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이나 능력과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전에 하셨던 일을 사도들과 함께 여전히 계속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던 예수님이 여전히 살아계신 것을 느끼게 해준 사건입니다. 그 표적이 있은 후 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갑자기 모여들자 베드로는 설교를 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한 설교의 핵심 주제는 오순절 사건 때 했던 설교와 동일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말하고, 심판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본문 3장의 설교가 앞의 설교와 좀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너희’에 해당되는 유대인들의 관계를 계속해서 연관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희’라는 단어를 10회 이상 사용하면서 성전 미문에서 일어난 사건이 예수님이 일으키신 일이고, 설교를 듣는 자들과 깊이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요약하면, ‘너희가 보고 있는 이 사람이 고쳐진 것은 너희가 죽인 예수님으로 인한 것이다. 너희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너희는 그분을 흉악한 범죄자와 바꾸어 십자가에 죽게 했다. 너희는 무지 때문에 그런 일을 행한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를 위하신다. 너희는 그분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복을 주시려고 하시니 너희는 회개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흥분하고 놀란 유대인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 앞으로 이끌고 간 것입니다. 그는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걷게 하신 예수님 앞에서 유대인들이 자신의 상태를 알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래서 일관적으로 집요하게 ‘너희’, ‘너희’, ‘너희’를 강조하면서 이 사건이 ‘너희’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위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거기 있던 동족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어떻게 무시해 왔는지, 그런 반역적인 태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는 것으로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그런 죄인인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기고 계시는지, 그런 하나님 앞에서 멸망을 피하기 위해 그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결단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다른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너희 자신에 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너희’의 담겨진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런 ‘너희’의 문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몰랐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습니다. 베드로가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말한 대로 그들은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여전히 일하고 계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호기심으로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을 신비롭게 쳐다본 것입니다. 기적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반응이 그들의 무지한 상태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또 17절에서 베드로가 말한 대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이 그 무지에서 깨어나도록 설교했습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 너는 멸망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을 너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너를 위해 옛적부터 계획하신 일이다. 너는 회개해야 한다. 그렇게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영혼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그들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자신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했습니다. 자기 동족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 애착만큼이나 베드로는 그들의 상태 때문에 답답함을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지는 공부할 기회가 없어서, 지식이 짧아서 생긴 무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무지였습니다. 죄 때문에 생긴 무지입니다. 교만 때문에 착각에 빠져 생긴 무지입니다. 그런 무지 아래에 있을 때 인간은 헛된 것을 위해 수고하고, 헛된 것에 목숨을 걸고, 헛된 것에 놀라 흥분합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는 삶을 사는 인간은 아무리 지혜를 동원해도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인생을 살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모순된 것이고, 허무한 일이기 때문에 그러한 인간의 삶은 어리석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속으면서 살다가 거짓에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이 원하는 바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고, 자신들을 통해 일어난 기적의 의미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적으로 인해 우쭐해지거나, 교만해져서 스스로 속고 남들도 속이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각성케 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점점 미움과 다툼과 증오와 번민이 크게 일어날 것이고, 한편에서는 뭔가 대단한 것을 이룬 것처럼 떠들어대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고통과 슬픔 그 두 가지 모두를 기회 삼아 사람들을 이용할 것입니다. 종교도 그런 선상에서 활동할 것입니다. 다른 종교나 이단 뿐 아니라 상당수의 기독교마저 그리스도를 모르는 무지 속에서 자신도 속고 다른 사람도 속여 이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성도는 세상에 아무리 큰 환란이 일어나서 망할 것 같아도, 반대로 아무리 펄쩍 뛸 좋은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고 유유히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고 그 사건들 속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집중하면서, 또 구원받아야 할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진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나니아와 삽비라 (행 4:32-5:11) (0) | 2016.08.21 |
---|---|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는 복음 (행 4:1-31) (0) | 2016.08.14 |
초대교회로 돌아가려면 (행 2:37-47) (0) | 2016.07.31 |
긴장 속에서 구원 받게 하심 (행 2:14-36) (0) | 2016.07.24 |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행 2:1-13) (0) | 2016.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