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는 복음 (행 4:1-31)

따뜻한 진리 2016. 8. 14. 23:34

사도행전 4:1-3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에서 심문을 받고 예수의 이름을 더 이상 전하지 못하도록 협박을 받게 되는 내용인데, 이 일은 앞에서 선천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 걷게 된 사건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두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객관적인 조사를 하고자 하는 태도가 아니라 이미 불쾌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7절을 보면 공회원들은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사도들에게 물었는데, 이는 사도들이 행한 기적의 근원이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매도했던 것처럼 사도들도 귀신의 힘을 의지해 그런 일을 행한 것이라고 몰아붙이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런 장면은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심문받으셨을 때와 동일하며, 사도들 역시 예수님이 당하신 일을 자신들도 당한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11절에서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라는 한 말은 이미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시편 118편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을 반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유일한 구원의 주체로 말씀하셨듯, 제자들도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전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당하셨던 일들을 동일하게 당함으로써 제자들 자신들을 통해 예수님이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과 걷지 못한 장애인의 치유 사건을 계기로 유대인 대중에게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렇게 앞에서는 일반적인 유대 백성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했었다면 이번에는 예수 죽이는 일을 주도했던 공회원들 앞에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심문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사람이 나은 것이라고, 사람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베드로가 9절에서 12절 까지 말한 내용은 이런 의미입니다. ‘이 병자가 치료된 일은 너희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고, 숨기고 싶고, 없애려 했던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여전히 살아계셔서 일으키신 일이다. 너희가 상상하는 다른 원인이나 다른 존재는 이런 일을 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허락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심문받던 사도들 옆에는 그 병이 나아 걷게 된 사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공회원들도 그 사람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치유된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회원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이 실제적인 사건, 선한 변화를 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걷지 못했던 사람이 일어나게 된 것처럼 분명한 실재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경험하는 것이고,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고,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험해야 믿을 수 있다거나 신비 체험이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분명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실제 경험을 하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사람의 어떤 깨달음을 전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과 변화와 능력을 경험하고, 그 구원을 경험하고 있는 자들이 그것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교육으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교육,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는 그것으로 구원에 가까워지거나, 성도로서 완성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의 배움은 가르침을 받는 자가 자신이 거듭난 성도인지를 끊임없이 점검하게 하면서 거듭나지 않았다면, 회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그것을 구하도록 돕는 일일 뿐입니다. 또 그 사람이 거듭난 성도라면 일상에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도록 돕는 방법일 뿐입니다. 복음이 한 영혼 속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은 깊은 사고와 깨달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세상 교육의 효과 같은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다양한 요소와 특성 중의 어떤 부분만 고치고, 발전시켜서 완성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태어나서 멸망의 길을 자처하면서 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활동도 구원의 가능성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복음은 세상에 축적된 모든 지식이나 어떤 천재가 인간과 세상에 대해 깨닫는 것보다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드러내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존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른 구원은 없다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주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을 계속 강조하는데, 공회원들은 인간들이 쌓아온 지식, 인간의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의 사건과 베드로의 증언을 판단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말을 듣고 그가 본래 학문 없는,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인 줄 알았다가 놀랐다고 말합니다. 애초에 무시가 깔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공회원들의 신분과 배경을 현대의 것으로 설명하자면 그들은 금수저이고, 유수한 대학을 나온 판검사, 정치인들 집단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나사렛 예수와 그분을 증언하는 제자 베드로는 얼마나 우스운 존재로 여겨졌겠습니까? 그런데 그리 잘난 자들이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들의 똑똑한 머리로, 논리로 반박하고 이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방법은 위협, 협박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세상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이유는 이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감정의 문제입니다. 2절에서 말하는 대로 공회원들은 복음 전하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세워온 체계와 권위를 무시하고 끼어든 예수가 싫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내가 원하는 삶, 내 생각대로 잘 되고 있는 삶에 불쑥 개입하셔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 싫은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고, 그분이 심판자이심을 알아도 그분 앞에 엎드리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몸에 해로운 것을 알아도 끊지 못하는 것처럼, 법의 처벌을 받을 것을 알아도 범죄를 저지르는 것처럼 인간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멸망의 길을 피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공회원들은 베드로의 말을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마음의 상태는 여전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유일하신 구원의 방법 앞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마지막 22절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의 나이를 언급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날 때부터 걷지 못한 자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분명한 사건, 엄연한 사실이었음에도 그들은 믿지 않고 어리석은 핍박을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여전히 살아계신 구원자이심을 알리고 계시지만 본문의 공회원들처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이 아무리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이라도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람이 의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전혀 다른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까?  3천명, 5천 명의 성도들처럼 회심해서 구원을 얻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으로 믿을 수 없는 복음을 어떤 사람들은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말과 능력이 아닌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시는 일로 가능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일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바르게 전해 질 때 이렇게 두 가진 상반된 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복음이 믿는 자들에게는 복된 소식이지만 그것을 거절하고 핍박하는 자들에게는 그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심판을 자처하는 악한 태도를 드러내게 하여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복음 사역을 통해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이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능력을 보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 때문에 거절당하고 핍박 받는 것을 통해서도 인간에게는 정말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23절에서 31절을 보면 사도들이 핍박당한 일로 인해 교회가 더 기도하고 복음을 더 담대하게 전했던 결과가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복음을 통해 실제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복음에 대한 확신이 뜨거워지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