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12-4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복음 전하는 일을 시기한 공회는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를 통해 사도들을 감옥에서 나오게 하셨고,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생명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전했습니다. 경비원들이 가보니 감옥은 튼튼하게 그대로 있었고, 지키던 사람들도 그대로였는데 사도들이 탈출한 사실에 공회원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다시 끌어다가 협박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공회원들의 귄위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 전했던 일은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사도들을 감옥에서 꺼내준 후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명령한 것은 그것을 지지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일어난 모든 이적들과 성령께서 보이신 표적들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32절에서 사도들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들이 공회원들 앞에서 주장한 것은 자신들의 일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9절에서 사도들은 당신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공회원들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도들은 변함없이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청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회원들은 흥분해서 사도들을 없애버리려고 했는데, 그 때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중재를 합니다.
가말리엘은 유대인들의 위대한 스승 중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등장하는 사도바울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공회원들은 가말리엘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가말리엘은 공회원들에게 사도들을 내버려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갈릴리의 유다와 드다라는 두 사람을 언급하며 그들을 각각 추종했던 반란세력이 시간이 지나 사라졌듯 사람이 일으킨 일이라면 예수를 추종하는 세력들도 시간 속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지역에는 수많은 반란과 폭동이 있었는데 가말리엘은 그런 일들의 결과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새로운 시도, 변혁을 위한 움직임들은 시간이 지나면 퇴색됩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은 유행처럼 지나갑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동조하고 지지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니 지나치게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가말리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가말리엘은 사도들이 하는 일이 정말 하나님이 시키셔서 하는 일이라면 그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일 것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사도들을 배려한 것은 아닙니다. 가말리엘이 베푼 관용은 자신이 존경받는 자로서 덕망을 더 치장하기 위한 일에 불과합니다. 공회원들 모두가 흥분한 분위기에서 자신은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권력을 쥐고 있는 자답게 여유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복음 사역의 진행을 도왔지만 그러나 예수를 믿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관용이 하나님을 아는 자의 합당하고도 성숙한 신앙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의 중재는 그저 공회원들의 수준과 품위를 지키는 일을 도왔을 뿐입니다. 가말리엘이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자신의 권위로 사도들을 조심스럽게 대해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채찍에 맞고 풀려나야 했습니다. 41절에서 나타나듯 사도들의 경험은 배려가 아닌 능욕을 당한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권위와 세상의 권위가 충돌합니다. 그 충돌은 세상 권력이 복음을 핍박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세상 권력이 복음에 관용을 베풀어 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 관용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복음 전파를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기독교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허용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 권력이 핍박을 하든지 관용을 베풀든지 그것은 자신들이 복음 위에 있다는 생각을 나타냅니다. 지켜보면서 이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기독교에 대해 악한 감정이 없고, 주변 사람이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것을 허용해주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나중에 진짜 하나님이 계시고 복음이 진짜로 드러나면 하나님이 자기를 잘 봐주시겠지 하는 기대를 합니다. 그것은 가말리엘이 가졌던 태도와 유사합니다.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잃지는 않고 싶고, 자신의 귀에 들린 이 복음이 진짜라는 것이 드러났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정상참작을 받기 위해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과연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오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를 도왔다고 해서, 선교활동이나 교회에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런 지도자나 개인이나 나라에 일반적인 은총을 더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시고 구주가 되심을 믿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회개해야 하고, 그분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심을 전제합니다. 30절과 31절을 보면 사도들은 이 복음을 공회원들 앞에서 증언했습니다. 이 복음을 개인적으로 믿고 그 복음을 주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핍박하든지 허용하든지 그 자신이 복음 앞에서 순종하지 않는 것은 모두 대적하는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겠다는 듯 행동했지만 그 자신의 의견과 다른 공회원들의 결정이 하나로 융합되어서 사도들을 때리는 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사건을 겪고 가말리엘에 대해 고마워 한 것이 아니라 공회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름을 위해 능욕 받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세상 권세는 적극적으로든지, 수동적으로든지 하나님의 복음에 대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그런 대적하는 세력들에 방해를 받았지만 결코 중단되거나 쇠퇴하지 않았음을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들 역시 의기소침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면서 열심을 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일이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계속 진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자신들을 가로막는 세상 세력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신비롭게 건져내셔서 가던 길을 계속가게 하시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세상은 복음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주어져서 신앙생활 하는데 별다른 제약이 없어서 그런 방해를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이 참된 신앙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껍데기 교인을 양산해내는 환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말리엘이 노리는 것입니다. 사탄이 노리는 것입니다. 핍박하기보다 그냥 내버려두면 머지않아 사그라질 것이라는 대적자들의 예상대로 교회가 그런 위험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식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냥 놔두시지 않습니다. 구원하실 자들에게 고난을 주셔서 정련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도들은 오히려 핍박과 고난이 신앙에 유익임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에서 사도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고난당하게 하시는 것이 큰 특권인 줄 알고 기뻐했던 것 것처럼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데반이 전한 복음 1 (행 6:8-15) (0) | 2016.09.11 |
---|---|
교회의 우선순위 (행 6:1-7 ) (0) | 2016.09.04 |
아나니아와 삽비라 (행 4:32-5:11) (0) | 2016.08.21 |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는 복음 (행 4:1-31) (0) | 2016.08.14 |
사도들의 관심사를 따라 (행 3장) (0) | 2016.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