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9-1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스데반은 아브라함에 이어 요셉에 대해 말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인생반전에 대한 이야기로 흔히 묘사되고, 유대인들과 공회원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역사였지만 스데반은 다른 관점에서 요셉 이야기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유독 요셉을 죽인 형제들을 ‘우리 조상들’이라고 반복 표현하며 듣는 자들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요셉을 배척한 그 형제들, 조상들의 행위가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인 유대인들의 자신의 일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배척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배척 받은 것을 예표합니다.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공회원들이 조상 대대로 반복하고 있는 죄를 깨닫게 하려한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욱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또 요셉은 형들의 문제를 잘 들춰냈기 때문에 형들은 더욱 요셉을 미워했는데, 요셉이 자신의 꿈 이야기까지 한 것은 형들의 쌓인 감정을 터뜨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통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킬 기회를 얻었지만 거절했습니다. 형제들은 은 이십 개에 요셉을 팔았지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애굽의 통치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셉 이야기를 통해 드러난 결과는 무엇입니까?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을 일으킨 요셉의 그 특별함은 요셉 자신을 위한 우월하게 만들기 위한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게 하신 것, 특별한 꿈을 주신 것은 그 형제들을 차별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요셉의 형제들을 소외시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요셉의 형제들을 구원하시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 때문입니다. 그분이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돈독하고 긴밀한 관계를 드러내신 것은 사실을 말씀하신 것인데,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그런 말씀을 도저히 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참람하게 여겼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을 형들이 못 마땅하게 여긴 것처럼,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주장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질투심 때문에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니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 없음을 예수님이 지적하셨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에게 수치심과 죄책감과 열등감이 일어난 것입니다.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죽인 후에도 여전히 복음에 대해 그런 반응을 했고, 스데반은 그들의 그런 태도가 요셉을 죽인 형제들의 죄성과 무지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받지 못했다고,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고집부리고 완악한 자세를 지키는 거라고 정당화 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런 태도를 고수할 것이다.’ 인간은 상대가 자기가 원하는 방법으로 만족감을 주고,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내가 잘못이 있어도 덮어주고, 나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칭찬과 지지만 해주길 원합니다. 그런 종류의 사랑이 필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인간을 온전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나한테 그렇게 안 해줬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비뚤어져 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에 대한 그런 불만과 그것을 부채질하는 요셉에게 화풀이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있는데 그것을 자꾸 들추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 인간이 타락했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 주시지 않아서 인간의 마음이 뒤틀렸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을 궁극적으로 바르고 안전하게 인도해 줄 사랑을 원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면서 지지해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은 간섭으로 여기면서 뱀의 말은 달콤하게 여긴 것처럼 거짓에서 사랑을 느끼는 것이 인간입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사랑이신데, 인간은 죄인인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자존심 때문에 거부합니다. 죄를 건드리고 해결하는 것이 사랑인데, 인간은 죄를 건드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대대로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해왔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몰랐습니다. 요셉의 존재와 행동이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인 줄 몰랐습니다.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셔서 자격 없는 자신들에게 그 혜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줄 그들은 몰랐습니다(17절). 자신들의 무지와 죄를 뛰어넘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교회에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노래를 부르지만, 거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통해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의 배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 노래를 좋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자신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녀도 여전히 자기애에 빠져서 그것을 충족하려고 기대를 하기 쉽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사랑인 줄 모르는 무지함 속에 있을 뿐 아니라 이기적으로 사랑을 추구하기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에게 미치고 있는데도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그 사랑 앞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거룩한 사랑으로서 우리를 하나님 자신에게 걸맞은, 어울리는 존재로 만드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느끼기에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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