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데반이 전한 복음 1 (행 6:8-15)

따뜻한 진리 2016. 9. 11. 23:38

사도행전 6:8-1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구제하는 문제로 초대교회가 일곱 집사를 세웠는데, 그중 스데반이라는 집사에 대한 이야기가 본문에 등장합니다. 스데반은 집사로 세워졌지만 활동영역이 단지 교회 안에서 일반적인 봉사를 담당하는 것으로 제한되지는 않았습니다. 8절을 보면 스데반은 교회 밖의 사람들 앞에서 기이한 능력과 표적을 나타냈고, 복음을 변론하는 일에도 능력이 있었습니다. 즉 초대교회가 세운 집사는 단순히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고, 복음의 능력에 붙들려 사도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역을 감당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표적을 행하자 어떤 이들이 시비를 걸었지만 그가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지혜롭게 복음을 변론하는 것을 말로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스데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사람들을 매수해서 거짓말을 하게 했고, 공회에 끌고 갔습니다. 스데반이 전했고,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를 공회원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믿었습니까?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 약속된 땅에 거하는 것,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이 구원을 보장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나타나 그 토대를 무너뜨리고 자기가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유대인들, 특히 지도층들인 공회원들은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71절에서 그들은 스데반이 가르치고 증언하는 이것이 사실이냐하고 심문 했습니다. 거기서 스데반은 변론을 했는데, 우리에게는 한 편의 설교와 같습니다.

 

    그 설교의 주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거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 받은 땅에서 살고 있다고 해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데반은 말합니다. 두 번째,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속된 땅도 혈통도 예배드리는 장소도 중요하지 않으면 무엇이 중요하다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본질을 놓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들을 계속 이스라엘에 보내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을 계속 거절했습니다. 79절을 보면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해서 팔았고, 2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모세를 보내셨는데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하고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땅과 율법과 성전 등을 통해 자기가 누구이신지를 나타내시고 구원자를 보내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그런 하나님을 믿기보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을 계속 거절하다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거절했다는 것을 스데반은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라고, 너희 조상들이 그랬듯이 너희들도 그러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드러내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종교적이고 외형적인 것은 얼마든지 하려고 하는데 인격체이신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차별화시켜주고, 내면적 우월함을 쉽게 느끼게 해주는 종교 형식들을 취하는 데는 열심을 냅니다. 그래서 약속된 땅에 머무르고, 제사도 드리고, 헌금도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정작 하나님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시려고 할 때, 자기와의 관계로 진지하게 부르실 때 사람은 회피합니다. 달아납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숨은 것처럼 합니다.

 

    복음의 목적은 단지 우리의 구원 받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알아보고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세상 어떤 것보다 옳으시고, 세상 어떤 것보다 선하시고, 모든 생명과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주인이심을 알고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할 능력이 없는 죄인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자신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기독교의 목적입니다. 이 인식이 없으면 구원이든, 영생이든, 신앙의 어떤 내용이든지 우리의 이기심에 따라 추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정작 누군가가 본질을 건드리는 이야기, 하나님에 대해 불성실하고 있음을 깨닫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면 반감을 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말을 다 들은 그들은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변론을 듣는 대제사장들의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그런 설교를 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공회원들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였거나 어떤 감정 표출을 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615절에 나오는 대로 자신에게 불의하게 협박을 하고, 심문하는 대제사장들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 같았고, 72절을 보면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끌려와서 변론을 해야 하는 것이 그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영혼들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복음 앞에 굴복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이 전한 복음에 분노하며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 자체이신데, 사람은 다른 헛된 것에서 복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음, 성경이 말하는 복을 얻으려면 그 헛된 거짓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착각하고 있는 것들, 하나님을 기만하고 있는 것들을 밝혀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별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런 깨어짐이 있어야만 가망 없는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왜 필요한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섬기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헛된 것들에 대해 눈을 뜨고 자유하게 만들어줍니다. 죄와 세상의 헛된 것들을 버리게 합니다. 악인은 복음이 자신의 것을 빼앗는 것으로 오해 하지만, 성도는 복음이 주는 자유를 경험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