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17-60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유대교의 모든 것, 율법과 성막이 모세를 통해 왔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건드리는 것은 유대인들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6:11을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스데반이 하나님 뿐 아니라 모세도 모독한 것처럼 일을 꾸몄을 만큼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나 모세를 모독한 것이나 거의 동일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자신이 모세를 모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회원들이 모세의 의미를 모르고 예수님을 배척했음을 지적했습니다. 모세는 그 스스로 위대한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증거한 인물임을 깨닫도록 스데반은 설명을 한 것입니다. 모세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삶을 살려고 한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 왕의 총애를 받고 야곱의 가족들도 특별한 대우를 받았지만 요셉이 죽은 후 약 사백 년이 지났을 때 이집트 왕은 히브리인들을 위협세력으로 여기며 통제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태어날 때의 바로는 히브리인들이 남자 아이를 낳으면 죽였고, 모세도 죽을 위험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모세는 장성해서 자신의 동족인 히브리인들이 핍박 받는 현장에 개입하려 했지만, 이집트 관리자를 죽게 했고 동족 히브리인들에게도 배척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고, 그를 통해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 광야 생활 내내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기적이 베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불러내신 것처럼 그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셨지만 그들은 조상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그리워했고, 모세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출생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분 역시 헤롯의 살해 위협 속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모세가 이 땅의 가시적인 악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근본적으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십니다. 모세가 이적을 행하고 율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해 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이적을 행하시고 율법의 정신을 바르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욱 탁월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셨고, 인간의 문제를 밝히셨고, 구원의 길을 완전하게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대적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도 대적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자신들을 다루신 방식에 불만을 품은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사람을 통해 자신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이 기적을 베풀 때는 뭔가 기대를 했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들춰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닫게 만듭니다.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그분의 십자가 사역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모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고,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과 성막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스데반이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집중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문제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지, 그분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어떻게 여기시는지 등등 성경의 내용들은 모자이크처럼 예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제물로 바쳐져야 했고, 야곱의 특별한 아들 요셉은 형들에 의해 팔려야 했습니다. 자기 동족을 위해 헌신했던 모세는 동족들에게 존경을 받기보다 반대를 당했습니다. 구약 당시에는 여러 인물들에게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는지, 왜 그런 일을 당하게 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문점들이 풀리게 됩니다. 성경의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알고 믿는 일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예수님을 예고하고 증거하는 일에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자신은 그런 역할을 인식하지 못했고, 증거하는 종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그 설교를 듣고 있었던 공회원들은 그 사실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알아들었지만, 그들은 분노했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정말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처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로서 성령을 거스르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대대로 그랬던 것처럼, 마침내 오신 예수님에게 유대인들이 그런 것처럼 스데반에게도 또 그런 악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과 행동은 스데반의 설교가 옳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었습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그 자신의 행동으로 스스로가 죄인이며 예수님의 대속적인 희생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증명하고 말았습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을 냉혹하게 비판한 이 설교는 스데반 자신을 결국 요셉처럼,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당하게 만들었습니다. 앞에서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는 삼천 명이 믿는 일도 일어나고 그랬는데, 본문 어디에도 스데반의 설교로 믿는 자가 생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데반은 자신의 설교로 인해 죽었고, 그로 인해 초대교회에는 엄청난 핍박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스데반의 설교 사역은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종살이 하게도 하셨지만, 총리로 세워서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또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번성하게도 하셨지만 모진 핍박도 당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한 가지고 목적을 이뤄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실패가 아니듯, 스데반의 사역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사역으로 초대교회가 꽃을 피우는 때도 있었지만 스데반의 비극적인 순교 사건처럼 초대교회가 위축되는 일도 겪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살피겠지만 스데반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드러나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시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의 길을 그렇게 인도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셨듯이, 우리의 인생이 잘 풀리게도 하시지만, 깊은 고난을 겪게도 하십니다. 우리의 인생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그런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불만을 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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