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1-8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브라함 이야기를 먼저 꺼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혈연 상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지식과 순종이 구원과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주셔야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있는 곳에 찾아오셔서 부르신 분이십니다. 2절을 보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이셨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있던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는 문명이 발달한 도시국가이고, 우상을 숭배하던 곳 입니다. 그곳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척하고도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자기들이 만든 신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인간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차단하는 동시에 다른 거짓 신들을 빈자리에 채워 놓음으로써 참 신이신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게 만드는 그런 모습은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보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환경이나 우리의 환경이나 그 속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현실입니다. 우리는 본성상 자신의 생존과 생계와 건강과 안전과 즐거움 등 오직 눈에 보이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와 같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땅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갖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서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약속들을 기다렸을 때 보람을 느끼게 할 만큼 자기 인생 속에서 눈에 띄게 성취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이 아브라함 때에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여러 위험에서 건지셨고, 물질적으로도 부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99세가 될 때까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협조하려고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도 성취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중 그의 생애 동안 주신 것은 후손에 대한 약속 중에서도 이삭 하나였습니다. 게다가 5절이 말하는 대로 아브라함은 발붙일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 많아지게 될 후손들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사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거기서 구원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들이 어떻게 이뤄질지 드러날수록 아브라함은 자기 생애와 별 상관이 없다고 실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당장 어떤 성취나 혜택을 주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인생 동안 얻어서 누릴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은 왜 약속하셨습니까? 그 목적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이 하나님께서, 나의 능력으로 결코 나을 수 없는 이삭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약속하신 것들을 분명 이루시겠구나’하고 믿음이 생기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은 단지 아브라함 자신의 가문을 위한 약속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이스라엘 땅과 나라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에 대한 약속이고, 그 분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그의 후손들이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된 땅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터전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언약의 큰 그림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 인생에서 그 언약이 어떻게 성취될지,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약속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땅에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이루시는 일의 깊고도 원대한 크기를 생각할 때에 자신의 주제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이 지극히 작은 나를 생각하시고, 긴 시간 속에 잠깐 사는 나를 구원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안목은 좁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을 여깁니다. 물론 우리는 일상의 현실적인 만족을 얻을 때 기쁨을 누립니다. 그런 기쁨을 멀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금욕적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상의 모든 기쁨도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노벨상을 받고, 금메달을 따고, 우주에 가고, 나라를 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에 인생의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세상을 확실하게 주도해가고 계신 것을 보는 것이 피조물인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영광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생애 동안 그 언약의 성취가 어떻게 이뤄질지를 보고자 고대했던 것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우리 인생의 진정한 영광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고대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 세상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 우리 죄인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영원토록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인생의 기쁨이고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행복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한 영광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인간이 짧은 인생 동안 뭔가 이루려고 하는 것, 자기 경험 범위 안에서 해답을 얻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전체 우주 역사의 시간 중 극히 짧은 부분, 순간을 살아가는 인생들이 세상을 바꿔 놓을 것처럼 말하는 것은 교만이고 착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의 짧은 생애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약속하시면서 그가 자기 인생 안에 갇혀 있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살아볼 수 없는 먼 미래까지 아시며, 자신의 약속을 이루실 분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아닌, 죄인인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셨습니다. 자기 현실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하나님을 믿도록 언약을 통해 이끄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완전하게 드러내신 분, 완전한 본을 보여주신 분, 완전한 길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를 위하신다는 사실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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