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32-11:18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본문에서는 이제 사울의 행적에 대한 설명이 잠깐 중단되고 베드로의 행적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룻다라는 지역에 성도들을 만나러 갔다가 8년 동안 중풍으로 누워있는 애니아라는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또 욥바라는 지역에서는 다비다라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던 여자 성도가 죽자 베드로가 다시 살려냈습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베드로가 방문한 그 이방지역들에 이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두 사람에게 일어난 기적이라는 동일한 패턴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셨고, 죽은 사람을 살리셨던 예수님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즉 이 사건들은 우리로 하여금 베드로가 아닌 예수님께 집중을 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34절을 보면 베드로 자신도 애니아의 중풍을 고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아닌 예수님께 집중하도록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기적을 통해서 놀란 많은 사람들도 주께로 돌아왔고(35절), 주님을 믿게 되는(42절) 동일한 결과를 나타냈습니다.
어어서 10장에는 고넬료라는 이방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로마 군대의 소대장이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자이면서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고넬료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말씀하셨는데, 그 내용은 베드로를 만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 사울과 아나니아를 만나게 하시려고 각각 두 사람에게 임하셨던 것처럼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고넬료뿐 아니라 베드로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는 죽었던 다비다를 살려낸 후 계속 그 욥바에서 무두장이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무두장이는 가죽제품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당시에 무두장이는 가죽을 얻기 위해 죽은 동물을 다뤄야 했기 때문에 유대교의 규례상 부정하게 취급되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런 집에 베드로가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그 집 옥상 같은 곳에 올라갔을 때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 같은 그릇에 부정한 짐승들이 담겨 있었고, 그것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이 주님의 음성인줄 알면서도 단호하게 그 부정한 것들을 결코 먹을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런 베드로의 고집과 하나님의 말씀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 후 베드로가 놀라서 환상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을 때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이 베드로에게 도착했고, 성령께서는 베드로가 그들을 따라가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도착해서 함께 모여 있는 친척과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일으키신 일입니다.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하나님께서 꺾어 놓지 않으셨다면 그는 고넬료를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일어난 이 일 때문에 베드로는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11장 2절을 보면 고넬료 사건을 전해들은 예루살렘 신자들이 베드로가 돌아오자 그를 비난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먼저 예수를 믿은 자들은 유대인들이었고 할례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으려면 먼저 자신들처럼 유대인이 된 다음에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환상을 사람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릇 속 부정한 음식들을 보고 먹으라는 주님의 음성에 자기도 처음에는 강하게 거절했지만 하나님께서 계속 강권하셨고, 결국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방인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셨으니 사람이 그런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이든, 먼 타국에서 거주하는 자들이든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갑작스럽게 여러 곳,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과연 이 복음이 유대인 자신들을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해당이 되는지, 만약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믿음만으로 충분한 것인지, 유대교의 전통들을 추가로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초대교회는 혼란스러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구원받습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된 것으로 인해 절망하고, 멸망으로부터 나를 살리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방법을 주셨다는 소식에 감격하며, 그 예수를 의지하는 믿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성도로 부르신 것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단순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처럼,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변화된 것처럼,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면 대부분의 사람이 바뀝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회심하는 그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오래전부터 일하시지만, 구원받는 사람의 인식 속에서는 구원이 갑자기 한 방에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그 놀라운 일에 인간이 다른 것을 앞 뒤로 첨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단순한 구원을 받았지만 왜 신앙생활이 힘들고 복잡합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해 놓으셔도 인간은 또 딴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잊어버리고, 본질을 흐려버리거나 불경건한 삶을 살거나 하면서 어리석은 것을 구원의 요소로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구원도 가로막는 일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구원받았어도 끊임없이 점검하고 바로잡기 위해서 계속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무엇이 구원의 본질인지 혼동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믿는 자들, 새로운 신자들을 통해서 이미 믿은 자들도 계속 성숙시키신 것입니다. 양쪽 모두의 끊임없이 변화를 의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로 믿는 자를 구원하실 때 이미 믿은 자들을 붙여주셔서 서로에게 신앙의 유익이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부정한 음식을 어찌 먹을 수 있겠냐고 하나님께 반문했지만 그는 이미 피장의 집에 있으면서 이미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본문은 독자인 우리로 하여금 유대인의 대표 격인 베드로가 이방인들의 구원 문제를 거리낀 것이 얼마나 모순 된 것인지를 눈치 채도록 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이 유대교의 전통을 새 신자들에게 주장하려는 이 문제는 신약교회에 오랫동안 남아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이 문제를 계속 지적하고 있고, 갈라디아서에 가면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자세를 갖지 못하는 베드로를 꾸짖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단순한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으로 성도가 되었고, 교회의 구성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단순한 복음의 감격을 잘 잃어버리기 때문에 교회 안의 다른 요소들로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문제를 가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 안에 누적된 전통을 지키는 것을 구원의 절대적이 요소인 것처럼 착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자에게도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요구합니다. 예를 들면 서양 선교사들이나 한국 선교사들이나 동일하게 선교지에서 한동안 실수했던 것이 무엇이냐면 교회를 세우면 피아노를 예배당에 꼭 들여놓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 속에도 목사는 예배 때 꼭 양복을 입어야만 경건해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것처럼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문화이든, 도덕이든, 종교적 관습이든, 전통이든 새롭게 예수 믿는 신자들이나 선교지의 현지인들에게 주입하려 합니다. 구원과 무관한 것이지만 인간은 그런 고집을 부립니다. 유대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런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이 복음의 장애물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으로 구원 얻는 것인지 계속 깨닫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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