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19-30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오순절에 시작되었고, 스데반의 순교 사건 후 핍박을 피해 성도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이 이동하면서 처음에는 자기와 같은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고넬료와 같은, 유대인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에게도 전했고, 이제는 20절이 말하는 대로 헬라인으로 불리는 유대인도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던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성도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대상을 자신들로 좁게 생각했지만 복음은 이방으로 점점 확장되었습니다.
핍박 때문에 흩어진 성도들 중 몇 사람이 안디옥의 헬라인들에게도 예수를 전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믿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들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이 동일하게 그들에게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냅니다. 바나바는 중간에 다소에 들러 사울을 데리고 함께 안디옥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생겨난 성도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23절을 보면 바나바는 안디옥 성도들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회심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것으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한 순간의 믿음으로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씨가 심겨졌으면 그것이 잘 나라나도록 계속 물을 주고, 가꾸는 일을 해야 하듯이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믿음이 뿌리가 깊고 견고하게 내리도록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는 누군지, 왜 구원이 필요한지,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세상의 처음과 마지막과 그리고 그 중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안디옥 성도들에게 권면한대로 주와 함께 머무르는, 주님께 붙어서 순종하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바나바의 그런 가르침이 일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붙여진 명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당시 최고의 신분층은 로마인이었고, 문명과 철학을 가진 자들은 헬라인이었고, 수준 높은 윤리적 종교를 가진 자들은 유대인이었는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그런 것들에 속하지 않는 교회 밖에서 붙여준 조롱이 섞인 별명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들에게는 조롱 섞인 명칭이었지만 예수를 믿어 성도가 된 자들에게는 가장 적합한 명칭이 되었습니다. 하나가 될 수 없는 히브리인과 유대인과 헬라 이방인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 교회를 이루었기에,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교회로 모이게 하셨기에 그들은 정말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교회 밖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불릴 만큼 분명한 신앙적 정체성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뤘던 것입니다.
또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예루살렘교회를 물질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헌금을 모았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에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바나바를 보내 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제는 역으로 도움을 줄 생각을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이 그 후원금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가 막 시작될 때에 히브리파와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 문제로 분쟁이 있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에 살았던 토박이 신자들과 멀리 이방지역에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신자가 된 헬라파 신자들이 갈등을 일으켰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어떤 것을 묘사합니까? 히브리파인 성도들과 헬라파 성도들이 서로 위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울이 회심해서 찾아왔을 때 두려워했습니다. 또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교제한 것 때문에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처음에는 그렇게 당황했지만 그 과정에서 서서히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각 사람을 구원하시지만, 그 은혜는 단지 유대인들을 구원하시는 일과 이방 헬라인들을 구원하시는 별개의 일로 행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사람과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구원 받는 다른 사람들끼리의 관계도 변화시키십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인 자신들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해왔는데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혁명과 같은 변화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생각해낼 수도 없고, 사람이 일으킬 수도 없는 변화였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힘으로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무기와 군대를 없애고, 비폭력 평화운동을 하고, 건강한 정서함양을 위한 교육을 하고, 다양한 예술과 방송을 통해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도록 해도 세상은 인간의 힘으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갈등 문제, 편협한 사고와 자기 보호 본능은 오직 복음 안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것 중의 한 가지는 구원의 문제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인종, 혈통, 신분, 학벌, 재산, 외모, 평판 등 그 무엇도 죄인인 자신의 상태를 바꿀 수 없으며, 그런 것들이 구원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도록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중요한 문제, 죄로부터의 구원에 있어서 모든 인간은 똑같다는 깨달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불쌍한 존재라는 깨달음만이 서로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아야 하는 똑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임을 알 때 서로 겸손할 수 있고,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면서 기꺼이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의 구원을 위해, 서로가 주님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하고 믿음 위에 견고히 서도록 돕기 위해 그렇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 교회 안에서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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