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12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흔적들을 모두 없애야 했습니다. 그들이 섬기던 신상, 제단 등 그들의 종교와 관련된 것들 모두를 부수고, 불살라 없애야 했습니다. 특별히 본문 12장에서 반복 강조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 곳에 모두 모여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 이외에 가나안 사람들이 우상숭배 하던 장소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임의로 예배 장소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5절, 11절, 14절, 18절, 21절, 26절에는 ‘택하신 곳’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사람들의 타락한 종교성은 자신의 성향과 공로가 드러나는 예배의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자기만의 공간에 자신만을 지켜주는 신을 두고, 그 신에게 내가 정성을 다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표식을 하면서 예배 행위를 합니다. 돈이 많으면 그것을 더욱 규모 있게 할 것이고, 권력자는 자기 공동체를 다스리기 위해 자기가 만든 장소에서 자기가 원하는 신을 섬기도록 피지배자들에게 강요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예배는 그런 식으로 이용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김을 받으시고 이용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던 장소들 뿐 아니라 자신들이 임의로 예배 장소를 만들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아무데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자기들 맘대로 하나님을 만들고, 하나님과 무관한 종교행위를 해도 점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지정된 곳에 함께 모여서 예배해야만 그나마 자기들 멋대로의 종교를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으로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고, 예배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어디에서나 하나님은 우리와 진실한 관계를 맺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아무 곳에서나 예배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렇게 자발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나타내시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순수하게 기억하면서 적극적으로 그 하나님을 찾는 예배를 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주면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진노하실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배가 가능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예배장소를 한 곳으로 제한하셨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셨습니까? 예수님 오실 때까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예배의 대상이며 성령과 진리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면 어디서든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교회를 이루고 함께 모여 예배합니다. 우리는 장소나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완전히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소망해야 하지만 그러나 이 땅에서는 정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형식을 가지고 예배해야 합니다. 비록 구약 시대처럼 한 장소에만 예배 장소가 제한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어디서든 예배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어떤 제한이나 형식들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각자 혼자서 아무 시간에나 어디서든 마음대로 예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 입니까? 이스라엘이 가졌던 본성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발적인 신앙을 가져야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기까지 형식과 의무 아래에 즐거이 복종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성숙한 자는 자기를 아는 자이고, 너무 많은 자유는 자신을 망친다는 사실을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내는 방법이 아닙니다. 마치 아이가 칭찬을 받고 싶고, 용돈을 받고 싶어서 부모가 기뻐할 일을 눈치껏 잘 하는 것처럼,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께 복을 받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먼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이 마련해 주시는 구원의 길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것으로 역할을 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듭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어도 완전할 수 없고, 죄를 벗을 수 없기에 율법이 계속 내 죄성을 다뤄주고, 내가 방종하지 않도록 계속 건드려주는 교관의 역할을 합니다.
거듭난 자는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기 원하기 때문에 십계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기꺼이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시거나, 복을 더 주시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이미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존중하고, 성품을 드러내기 위해서 결코 부도덕 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죄를 다뤄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라고 명령하는 율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거울 역할을 계속합니다. 율법은 내 모습을 보게 할 뿐 아니라, 내 모습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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