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신 14장)

따뜻한 진리 2017. 4. 30. 23:38

신명기 14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선택되었고, 구별되었으며, 사랑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그렇게 자신들을 대해주시는 하나님이 정말 좋으신 분임을 인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순종하라고 주신 율법조차도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닌 사람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이거해라 저거해라 요구하는 것이 부모 잘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잘 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율법은 그것을 지켜야할 백성들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하나님이 주실 복을 제대로 누리게 하시려고 규칙들을 주신 것입니다.

 

    본문은 장례예식, 부정한 짐승, 음식이 되는 동물에 대한 태도, 십일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납득이 가지만 어떤 것들은 하나님께서 왜 요구하셨을지 잘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에게 그러했듯,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늘 다 이해할 수 없는 채 순종해야 할 부분을 남겨두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1절과 2절은 장례시에 자기 몸을 해롭게 하는 일을 금합니다. 가나안과 그 주변의 종교들은 죽은 자를 위해 애도하거나 큰 불행을 만났을 때 몸의 털을 다 밀거나 칼로 자기 살을 베는 행위를 했습니다. 그런 행위는 죽은 자를 살리려는 마술적인 행위와 관련이 있기도 하고, 자기에게 중요한 것을 잃었을 때에 그 상실감과 분노를 참지 못해서 자해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과 슬픔은 소중한 사람을 얻는 일과 잃는 일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우리에게 슬프지만 그런 피할 수 없는 순간들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 뿐 아니라 인생에는 수많은 슬픔, 공허, 우울함이 계속 밀려들어 옵니다. 그 때의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이 저지르는 것들은 대부분 자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 때 인간이 몸으로 행하는 것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 분노를 조절하기 위해서라고 어떤 사람들은 과학적인 설명을 하지만 사실은 건강을 해치고, 육체와 정신을 파괴하는 자해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집단적인 자해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1절이 말하는 대로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라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로 물든 세상 속에서 겪는 모든 일에 분노를 경험할 것이고, 결국 자기를 파괴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3절에서 21절은 음식으로 사용하는 짐승들에 대한 규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하다고 지정하신 짐승은 가축으로 키우는 열 가지 짐승이고, 또 발굽이 갈라진 동시에 되새김질을 하는 짐승입니다. 또 어류 중에서는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는 것이어야 하고, 배로 기어다니거나 많은 발로 기어다니는 것들도 부정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물의 피는 먹으면 안 됩니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낙타, 토끼, 돼지, , 오징어, 갑각류, 조개류 같은 것은 먹으면 안 되었습니다. 22절을 보면 새끼를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 까지 이런 음식들을 먹지 않습니다. 또 이스라엘에서는 햄버거를 파는 패스트푸드점에는 치즈버거를 팔지 않습니다. 어미젖에 해당하는 치즈와 고기가 함께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나누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사 속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았지만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그 해석들을 살펴보면 위생과 건강의 문제 때문이라는 견해, 그 동물들이 가진 성질이나 성격 때문이라는 견해, 이방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는 동물이라는 견해, 부정한 짐승들은 그것이 속한 자기 종의 공통적인 성향을 벗어난 것들이라는 견해,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분이 성경 속 언약과 관련되었다는 견해 들이 있습니다. 이 중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것은 마지막의 두 가지 인데, 자기가 속한 종이 가진 공통의 특성에서 벗어난 특징을 가진 짐승들은 부정하고,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에 따라 제물과 관련된 것들만 정한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신약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보자기에 담긴 부정한 짐승들을 먹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환상을 보았고, 더 이상 율법의 이런 규정에 속박되지 않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음식이 될 수 있는 동물들에 대해 어떤 것들은 깨끗하고, 어떤 것들은 부정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식욕이라는 본성 앞에서 제멋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 다 인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을 이어나가는 방법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거룩하고 안전한 우리의 양식이 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의 떡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짐승을 음식으로 취하는 과정마저도 피를 제거하는 것, 어미젖에 새끼를 삶지 말라는 금지 등으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놓치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육식을 허용하신 것은 죄 때문에 다른 생명의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이고,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통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비참함과 미안함을 가지고 육식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동물에 대한 정함과 부정함의 문제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상태 즉 죄로 인한 비참함과 구원을 위한 흠 없는 자의 희생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22절에서 29절은 십일조 문제를 말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복 받기 위해서 드리는 조공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감사함으로 고백하는 방법이었습니다. 21절이 말하는대로 십일조는 그것을 가지고 구별해서 가족들과 함께 먹으면서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이었습니다. 27절에 나온대로 눈에 보이는 소득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들에게 나누는 일에 사용해야 했습니다. 29절에 나오는 대로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자원으로 십일조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방법으로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십일조였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는 누구인지, 또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어떤 은혜를 베풀고 계신지를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깨닫고 나타내도록 돕는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생명을 통해 우리의 생명을 돌아보게 하며,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알기에 다른 사람에게 은혜 베풀기를 잊지 않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는 하나님의 사려 깊은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구원하시는 것인지를 풍성하게 이해시키려는 교육적인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