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날 (신 16:1-17)

따뜻한 진리 2017. 5. 14. 23:19

신명기 16:1-1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먼저 유월절은 이집트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열 가지 재앙 중 열 번째인 장자의 죽음을 피한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이날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 양을 잡아 그 피를 문틀의 양쪽 기둥과 위쪽 인방에 바르고, 양의 고기를 먹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죽어 마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방법에 순종하는 것만이 살 길임을 경험한 사건이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어린양이심을 알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어서 무교절을 설명합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이 끝난 이후 칠일 동안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빵을 주로 먹었는데, 맛있는 빵을 만들려면 반드시 발효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지난 후 곧 바로 이집트에서 탈출할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빵을 발효시키지 못한 채로 만들어 먹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구원이 언제 실현될지 모르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입맛을 충족시키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유월절과 무교절을 통해 이집트 종살이에서 겪은 고통과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롭게 된 것을 기념했습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것은 칠칠절입니다. 칠칠절은 49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50일을 뜻하는 오순절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 기간은 유월절 후 보리 추수가 시작되고 밀 추수가 끝나기까지의 기간에 해당합니다. 칠칠절을 통해 이스라엘은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변화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기억하시고, 생명을 유지케 하신다는 것을 기념했습니다.

 

    세 번째는 초막절입니다. 앞의 칠칠절이 봄 추수의 마무리 기간이었다면 초막절은 가을 추수의 마무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초막절의 일주일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지은 초막 안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초막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숙곳인데, 숙곳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난 후 처음 머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초막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였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광야 기간 동안에도 하나님은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이 때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이 세 가지 주요 절기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압제 아래에 있었으며, 압제하던 자들과 함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신들을 건져내셨으며, 그럼에도 자신들은 불순종해서 광야에서 살게 되었고, 그런 광야에서 하나님은 자신들을 지키셨으며, 결국 새 땅을 선물로 주셨고, 다가오는 미래가 늘 불안하지만 하나님은 어김없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명절과 공휴일을 매년 반복해서 지키고, 그것을 기다리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매년 절기를 반복하면서 일생을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명절을 위해 먼 거리를 힘들게 이동하고, 적지 않은 물질을 소비해야 했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무 과한 것을 명령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명절이나 기념일, 생일 같은 것들을 챙기느라 인생의 많은 부분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별별 상업화된 기념일들도 챙깁니다. 물론 그런 기념일 덕분에 서먹한 관계들이 개선되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뭔가 일상에 설렘과 활력을 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념일들은 그것을 지키는 그 사회, 그 사람이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를 말해줍니다. 또 기념의 날들이 인간의 시간, 때에 대한 개념에 중요한 영향을 줍니다. 즐거운 기념일, 명절이 되면 자동적으로 기분이 들뜹니다. 또 어떤 기념일은 다가올수록 심적 부담이 밀려오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 단위 속에서 우리는 반복되는 날들의 단위에 습관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이라는 시간단위와 함께, 중요한 3대 절기를 주셔서 그 반복 속에서 시간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관계를 형성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 속에서 세상의 다른 것을 기념하고, 사람들끼리 서로의 무엇을 기념하기 전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고,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지를 눈치채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 그 단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관계가 성숙될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타임머신이 발명되어서 과거와 미래로 이동한다 해도, 의학기술의 혁명으로 수백 년을 산다 해도, 이 시간 단위 속에 의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놓친다면 인생과 역사는 헛 것이 됩니다.

 

   성도는 사람들이 만든 기념일들을 기억해주고, 축하해주고, 슬퍼해주면서 지켜야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구원역사의 기념이 되는 것들을 잘 기념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본문의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을 지키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시간 단위 속에서 반복적으로 기억해야 할 주체가 되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들뜨는 성탄절, 진실한 참회 없이 형식적으로 슬퍼하는 척 하는 고난 주간,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과 복종이 없는 부활절이 아니어야 합니다. 나 같은 자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씩 형식적으로 생각하고 할 도리를 다했다고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짧은 단위의 반복인 일주일 단위의 주일 속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일의 예배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우리가 항상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날들은 기념하면서도 거의 기다리지 않는 그 날,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으신 그 날, 바로 주님이 오실 그날을 좀 더 자주 기대하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오실 주님을 기다릴 때에 바른 신앙을 가지고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