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넘어 (신 26장)

따뜻한 진리 2017. 7. 16. 22:38

신명기 26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모세가 율법을 다시 설교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신명기 1장부터 곧바로 율법을 설명하지 않고 11장까지는 지난 역사 속에서 백성들이 불순종 했던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이스라엘을 인도하셨고 가나안 땅을 마침내 주실 것을 말했습니다. 모세가 열한 장에 걸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그분이 주신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마음을 갖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없다면 명령을 기쁨으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형식적인 순종은 관계에 독이 될 뿐입니다. 그렇게 11장까지 모세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동기부여를 하고 이어서 12장부터 25장까지 십계명을 기초로 하는 율법의 다양한 내용들을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지난 주까지의 내용입니다.

 

    세부적인 율법 설명은 이제 끝났지만 모세는 26장에서 마지막 34장까지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동기부여를 합니다. 복과 저주라는 큰 맥락에서 순종해야 할 이유를 말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는 누구인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왜 지켜야 하는 지를 가르치면서 마무리를 합니다. 그러니까 신명기는 구조상 율법의 내용을 가운데 두고 제발 하나님이 주신 이 율법을 지키라는 간곡한 권면으로 앞뒤에서 감싼 형태입니다.

 

    오늘 본문 26장은 그 후반부의 권면으로 넘어가는 내용인데 예배와 십일조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사람의 수직적인 관계를 말한다면, 십일조는 사람들과의 수평적 관계를 말합니다. 먼저 1절부터 11절의 예배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으면 처음 수확한 것을 가지고 지정된 예배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5절부터 9절을 보면 그 예물을 재단에 내려놓고 뭔가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라고 합니다. 그 내용은 방황했던 야곱과 같은 조상들과 애굽에서의 위태롭고 고통스런 삶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미약하게 망할 수도 있었던 조상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고, 약속하신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마침내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단순히 첫 소산을 예물로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런 내용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풍요로운 땅에서 좋은 소득을 얻게 되어 기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충분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것으로 충분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신들이 경험하지 않은 과거 조상들의 역사와 그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을 반드시 회상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를 뒤돌아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다음으로 12절부터 15절을 보면 십일조에 대한 내용인데, 11절과 12절을 보면 십일조의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와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입니다. 십일조는 예배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한 후 자연스럽게 뒤 따라와야 하는 행위로 명령하고 있습니다. 즉 백성들은 과거에 가난했던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셨듯이 자신들도 가난한 자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그런 나눔을 통해 백성들은 과거에 아무것도 없었던 자신들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신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들을 책임져 주실 것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지금 손에 있는 것이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은혜인 줄 믿기 때문에, 앞으로도 신실하게 인도하실 것을 신뢰하기 때문에 욕심 부리지 않고, 장래에 대한 불안함 없이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일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왜 그런 것을 명령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믿음은 개인의 경험, 개인적 고백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른 신앙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기 경험을 근거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고, 걱정하던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께 감사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아무리 하나님에 관해 주관적인 경험, 은혜로운 경험을 많이 해도 그것과 함께 공동체적이고 전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그 신자는 매우 빈약하고, 왜곡된 신앙을 갖기 쉽습니다.

 

    현대인들은 특히나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가집니다. 객관적인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어색해하고 지루해 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대중적 설교들은 신앙생활의 신변잡기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이야기들로 채워집니다. 그래야 자기와 관계가 있고, 나의 현실을 이겨내는데 위로와 동기부여가 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말합니다. 추수의 첫 결실처럼 개인이 현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제물을 가져온 자는 예배를 통해서 자기가 존재하기도 전에 계셨던 하나님, 조상들에게 약속 하시고 인도해 오신 하나님, 이제 그 약속된 땅에서 결실을 손에 들고 내가 서 있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나아가 내가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역사를 움직여 가실 하나님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잠깐 살다 가는 우리 인생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지는 구원의 풍성함에 대해 파란만장한 역사를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누군가의 한 개인의 인생 자체로 그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은 전 역사 속에서 부분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그렇게 완성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나타내시려는 큰 그림의 부분 속에서 역할을 하다가 하나님께로 간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자기 본성,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니까 감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지만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실 때는 실의에 빠집니다. 죄에 대한 인식마저도 자기 잘못이 사람들 눈에 드러났고, 큰 문제를 일으키는 잘못을 했을 때만 죄책감을 느끼지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공동체적인 죄의 비참함과 자신의 죄인 됨 자체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온통 자기 구원과 자기 복만을 생각하지 창조와 타락과 구속 속에서 원대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획에 속해있다는 감격과 전율과 순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뒤를 돌아보고, 공동체적 역사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우리가 속해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 인생에 갇혀서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불건전하고 편협하게 자기에게 몰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개인적인 경험과 은혜 체험으로 신앙의 영역에 초대하시지만 신자는 더 나아가 시공을 초월한 전 우주적인 하나님의 계획의 부분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내 인생 속에서 다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풍성한 첫 수확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 드리면서 그런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손에 쥔 것이 있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고, 반대로 드릴 것이 없는 순간이 올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를 점검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이 자기가 잘나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드러내실 것이 있어서 은혜로 주신 것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풍족할 때에 그와 반대로 빈손인 자들, 자신이 언젠가 겪을 수도 있는 그 일을 지금 겪는 자들을 위해 십일조를 바친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부분들로 사용되고 있고, 하나님의 인도에 속해 있음을 서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있다고 교만하지 않고, 없다고 실족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겸손하게 신뢰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은 언젠가 빼앗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죽음은 세상 가치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을 빼앗기는 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순종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백성 삼아 주셨다는 사실이 가장 큰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우리에게 그런 이해와 믿음이 있어야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진심으로 일관되게 순종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