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복과 저주 사이에서 (신 27-28)

따뜻한 진리 2017. 7. 23. 23:38

신명기 27-28장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27장은 모세가 미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백성들은 그 때 석회를 바른 큰 돌들을 세워놓고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해야 합니다. 그 돌들은 최종적으로 에발산에 세워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섯 지파는 그리심 산에 서서 이스라엘에 축복을 하고, 다른 여섯 지파는 에발산에 서서 백성들에 저주를 외쳐야 했습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산인데 두 산의 꼭대기는 약 2.4km정도의 거리이고, 아래쪽의 거리는 500m 정도입니다. 9-26절에서 모세가 말한 이 내용을 나중에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그 산들 위에서 화답하면서 다짐을 하게 됩니다.

 

    이 내용들이 미래에 실행해야 할 일을 모세가 지시한 것이라면 28장에서는 다시 모세가 현재시점으로 돌아와 자기 앞에 있는 백성들에게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1절부터 14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 받고 나가도 복 받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풍성한 결실을 얻게 되고, 자손과 가축 같은 생명의 번성이 있게 되고,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되고, 국제적인 지위도 높아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에 복이 임할 거라고 말합니다. 이 복들은 정말 모든 것을 얻는, 개인과 나라가 부러울 것이 없는 상태가 될 것을 말합니다. 그 축복의 내용들은 추상적인 것들이 아니고 매우 현세적이고, 모든 인간이 꿈꾸는 욕망에 근거한 복들입니다. 고차원의 것을 약속하면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를 약속하면서 순종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복의 내용들이 귀에 익숙할 수 있습니다. 부흥집회 때 빈번하게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번영신학과 기복주의적인 신자들이 선호하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부흥강사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 바로 뒤 19절부터 마지막 68절에서 모세는 축복에 대한 내용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분량으로 저주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저주는 축복과 완전히 반전을 이루는 비참한 결과들을 말합니다. 생각만 해도 끔직해서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참담한 결과들을 예고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렇게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복과 저주로 경고를 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목적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겪게 될 장래를 예언 한 것입니다. 사사기와 열왕기서를 보면 본문에서 언급된 저주가 현실로 드러났음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죄로 인해 거의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고, 그 저주들을 실제로 겪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좋고 복된 것을 주겠다고 동기부여를 하고, 악한 것을 하지 못하도록 아무리 무섭게 협박을 해도 행동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저지를 일로 인해 복을 잃고 고통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합니다. 그게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게다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복을 자신이 누리고 있을수록, 풍요로울수록 죄인의 본성을 더 많이 드러냅니다. 배부를수록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그래서 6:11-12에서 모세는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풍족하고 배부를 때에 하나님을 잊게 될 가능성을 경고했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본문에서 그런 엄청난 복들을 말할 때도 그것이 죄인인 백성들에게 복이 아닌 독이 될 수 있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이 율법에 순종하도록 복으로 동기부여 하고 희망을 품게 하기 보다는 결국 자신들의 죄성으로 고통을 자처하게 될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복을 주셔도 죄를 선택하는 인간의 패역함을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단지 복과 저주 중에서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게 하는 일종의 예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축복보다 저주를 길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마음에 불편함을 느껴야 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슬퍼하면서 자신들이 자처하고 닥치게 될 저주에서 벗어나기를 구해야 했습니다.

 

    본문의 주제는 순종해서 복 받을 수 있다가 아닙니다. 순종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번성케 하셨고, 출애굽을 시켜주셨고,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그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누리게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선물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순종하는 조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좋은 것을 다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62, 63절이 말하는 대로 이스라엘은 여전히 부패한 본성을 버리지 못해서 자손과 땅이라는 복을 다 잃게 됩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불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율법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죄라고 말씀하신 것들, 하지 말라는 것들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 자신과 타인이 죄인인줄 알고 서로의 죄를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 서로 물고 뜯는 죄인이 서로를 배려하면서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법의 역할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죄성을 가지고도 그나마 살 수 있도록 법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자신들이 죄를 비참하게 깨닫도록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에 순종하여 죄를 다스려야 했고, 하나님께서 어떤 선물을 주시더라도 죄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교만한 마음으로 착각했듯이 율법을 착각한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인격적으로 겸손하게 엎드러지지 못한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원해달라고 요청하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가 죄에서 구원받아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진정 구해야 할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세상이 부러워 할 것을 다 갖는 것보다 자신의 부패한 본성이 새롭게 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것을 깨닫게 하는 역사였습니다. 인간이 인생 안에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역사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해결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절하는 죄와 그로 인한 멸망에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 죄가 해결되어야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시인하는 자들이 참된 복을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누렸던 복은 완전한 복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내린 저주도 완전한 멸망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복과 저주는 영원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을 통해 온 인류가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오도록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본문의 복과 저주는 영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복과 저주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가의 여부로 우리는 영원한 갈라집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깨닫지도 못했고, 죄로부터의 구원을 하나님께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로 우리는 죄를 깨닫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독생자를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으로, 그분께 우리의 전 존재를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정한 복, 영원한 복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