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1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지난 시간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에 대해 함께 나누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복입니다. 구약 여러 곳에서 여호와가 사람의 기업, 분깃이 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신명기 10:9, 시편 119:57). 여호와는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원천이시고, 추구해야 할 전부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주려고 하십니다. 사람의 창조와 타락과 구속이라는 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시려는 계획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자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구원을 얻은 자들은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이루기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할 때까지 가난함을 느끼면서 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더 나은 형편을 고대하면 사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릴 것입니다.
이어서 이번 시간에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애통하다는 것은 슬프고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기대하던 것이 좌절되었을 때, 자기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사람들은 애통합니다. 모든 인생은 기쁨과 슬픔을 경험합니다. 사람들은 기쁨이 좋은 것이지만 슬픔은 악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든 철학이나 종교들은 슬픔과 고통의 이유와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왔고, 어떻게 하면 그런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행복만을 누릴 수 있을지 해결책을 마련해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긍정적인 마음, 어떤 사람은 가난을 해결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말합니다. 또 불교는 그 해결점을 해탈이라고 말합니다. 다들 슬픔과 고통을 악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애통, 슬픔이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복 있다고 말씀하신 이 애통은 세상 사람들 누구나 경험하는 애통이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팔복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 자신과 연관된 성도의 애통입니다. 그 애통은 예수님 때문에 드러나게 된 죄로 인한 것입니다. 성도는 겉으로 볼 때 세상 사람들이 겪는 고통스런 슬픔과 유사한 애통을 경험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처럼 죄에 대한 인식 없이 고통 자체 때문에 슬프고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슬퍼할 수 없는 것을 애통합니다. 성도는 죄 때문에 애통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연관된 애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애통하는 자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고, 또 성도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죄로 인한 슬픔을 지니게 됩니다.
성도가 괴로운 슬픔을 겪는 이유는 자기 죄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자기 죄의 유혹과 씨름하면서 슬픔을 겪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자신의 죄가 아닌 세상의 죄, 타인의 죄에 피해를 입으면서 애통하기도 하고, 나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을지라도 타인들이 죄 가운데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애통하게 됩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강퍅하던 죄인이 그렇게 자신의 죄와 세상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 고통스런 슬픔을 겪는다는 것은 불편과 통증이라는 증상이 치료 받을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약 우리가 심각한 병에 걸려도 자각 증상이 없다면 치료의 기회를 놓칩니다. 동일하게 죄인이 죄에 대한 각성으로 슬픔을 겪는 것은 그 치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오게 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그런 애통하는 마음의 상태를 상한 심령이라고 말합니다. 시편51편에서 다윗은 밧세바를 범한 후 자신의 부패함에 대해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사야6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에 상함이 없고 애통함이 없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오직 심령이 상한 자들만이 의원이신 예수께 나옵니다. 자기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는 자들이 생명을 주실 분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애통을 겪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7장을 보면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위로는 괴로움과 슬픔을 달래주는 말과 행동입니다. 보통 이 세상의 위로는 근본적인 도움을 줄 수 없을 때 주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완전한 해결을 확인시켜주시고, 완전한 치료와 완전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을 바라보게 하는 위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완전히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들이 복된 이유가 그들의 슬픈 원인이 당장 완전히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위로를 받을 것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가 구원을 얻었지만 죄에서 완전하게 자유롭게 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입니다. 그 때까지 죄의 씨름을 감당하면서 믿음을 갖고 인내하도록 이 위로가 응원을 합니다. 그러나 이 위로는 단지 우리 마음을 안심시키고, 누군가가 나의 고통을 이해하고 있다는 정도의 진통제 같은 것이 아니라 결국 죄의 고통이 사라지고 완전한 생명과 자유를 얻게 될 확실한 해결책을 소유했다는 안심입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창조주께서 그것을 보증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로 태어납니다. 죄의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들에게 죄의 즐거움이 아닌 죄의 고통을 경험하면서 슬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락하실 구원의 방법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소망하면서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소망이고 위로가 됩니다. 말뿐인 세상의 위로, 실제 해결 능력이 없이 마음만을 만지는 위로가 아닌 우리 대신 아들이 저주를 당하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는 실제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자기 영혼에 대해 근심하고, 다른 영혼의 구원을 위해 슬퍼하는 성도들이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그 근심을 해결하실 유일한 해결책인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위로를 경험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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