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1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하나님 앞에서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과 온유함과 의에 주리고 목마름을 경험하는 자에게 만족과 위로와 치료와 배부름을 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팔복의 앞부분 네 가지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거듭난 성도의 상태라면, 그 뒤에 나오는 네 가지는 그 거듭난 자가 이 세상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삶을 사는 지를 말합니다.
하나씩 짚어보면 첫째로 거듭난 자는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깁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거듭난 자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될 자신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신 것을 알기 때문에 같은 처지의 다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긍휼이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긍휼이 여김을 받기 때문에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긴 것이 공로가 되어서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진실하다면 그 믿음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열매로 드러나 최종적으로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를 해석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이 청결합니다. 눈에 보이는 겉모습의 청결함보다 마음의 깨끗함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이 눈에 보이는 외적 정결과 외적 규칙들을 말하고 있는 의도를 유대인들은 알지 못하고 외형적인 종교성을 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듯이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종교적인 행위들을 열심히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겉모습은 흠잡을 것이 없었습니다. 도덕적이었고, 구제와 선행도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의를 위해 선행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 깨끗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단순하고, 진실하게 살고 행합니다. 다른 의도를 품거나 자기만족을 위해서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거듭난 자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마침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그래서 복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거듭난 자는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그는 평화를 추구합니다. 평화는 갈등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입니다. 세상에는 왜 평화가 없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생기는 결핍과 불안과 탐욕과 미움과 분노가 평화를 깨뜨립니다. 평화주의자들은 종교가 하나가 되고 사람들의 사고가 달라지면 세상이 평화로워질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추구해야 하지만 평화는 인간의 노력으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주장하고 평화주의를 이용하는 자들은 대부분 평화가 가진 이상적 아름다움으로 자기를 포장하거나 정치적 세력을 모으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앞에서 말한 마음의 청결이 없이 거짓 기만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평화를 깨뜨리는 자기 안의 죄의 본성을 다루지도 못하면서 고상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 인간과 나라들이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은 힘에 의한 것입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자가 지배해서 다른 세력들이 잠잠하도록 만들어 평화를 유지하거나, 모두가 치명적인 힘을 가지고는 서로를 건드리지 않는 방법으로 평화를 유지합니다. 그것이 세상이 만들어내는 억지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힘을 내려놓는 것, 죽음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죄가 멸절되어야,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해야 평화가 옵니다. 거듭난 자는 주님처럼 그런 희생과 죽음으로 평화를 이룹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처럼 평화를 이 땅에 가져오려고 애쓰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네 번째로 거듭난 자는 의를 위해 박해를 받습니다.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는 자를 세상이 좋아할 것 같지만 사실은 미워하고 박해할 것입니다. 거듭난 자들의 행위가 세상 사람들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주고, 인정해주기보다 그들이 불쌍하고, 썩어 오염되고, 저급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부끄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자신의 비참한 죄를 인정하기보다 거듭난 자들을 없애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성도를 핍박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들은 자기 의로움을 위해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 십자가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옳으심을 위할 뿐입니다. 그로인해 핍박을 당하는 것입니다.
팔복은 예수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팔복의 마지막인 의를 위한 박해를 말씀하시면서 11절에서 자신과 연결시키셨습니다. 여덟 번째 복 뿐 아니라 팔복의 전체가 예수님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팔복의 상태에서 사셨습니다. 거듭난 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이 팔복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 팔복의 경험 때문에 예수님을 더욱 가까이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의 헛된 복을 아쉬워하기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근심과 고난을 가까이하길 원합니다. 하나님만이 주시는 복, 하나님 나라를 얻게 되는 복을 누리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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