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1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들을 보시고는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1절을 보면 특별히 제자들이 예수님 가까이 나오기는 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닌 무리 전체를 대상으로 팔복을 포함한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설교를 하셨습니다.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깨닫고 행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도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팔복에 이어서 십계명을 기초로 하는 여러 율법의 근본 의도를 설명하셨는데, 이 역시 흠 없는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라는 교훈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그런 태도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은 건전한 내면과 행위를 위해 노력하는 도덕적 시민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달라질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지를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산상수훈의 내용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아본 자,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전제합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자들, 즉 자기 사람들, 자신과 관계있는 자들이 세상 속에서 이런 양태를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로 인해 변화를 입은 자들만 이해할 수 있고, 동의할 수 있고, 실천 가능한 것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은 예수님 자신이 먼저 그런 상태이셨고, 그런 삶을 실천하시면서 자기 백성들도 그런 삶을 살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누구나 모범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강의가 아니라 그 내용을 듣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과 아닌 자들을 나누는 구별을 만들어내는 설교였습니다. 예수를 알아보고, 믿고, 의지하는 자들과 예수를 그저 자기 지식으로 판단하고, 자기 욕망을 위해 따라다니는 자들을 나누는 역할을 했습니다. 산상수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거듭난 하나님 나라의 백성만이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드러낼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 서론 격인 팔복 중에서도 첫 번째인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해 살펴봅니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바라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유쾌한 상태,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통해 얻는 기쁨과 만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복 있는’ 것은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이 악인처럼 생존을 추구하지 않고 여호와를 인정하고 따르는 것을 말하듯 여호와의 인정을 받는 것, 옳다고 여김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서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는 나중에 천국을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을 통해 천국이 자기들 가운데 있음을 본 다는 것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통해 분명하게 자기들이 그 나라에 속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것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은 무엇입니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 곤경에 빠진 상태를 말합니다. 가난의 문제는 모든 인간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절대빈곤의 상태에서 생명을 위협받는 가난을 겪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가난에서 벗어나 풍족함 가운데 있지만 현재 누리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더 나은 부를 위해 근심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인간은 물질적 가난을 극복하려고, 가난을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가난이 아닌 영적 가난, 심령의 가난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돈, 음식, 옷, 집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결핍, 영적 가난을 느끼냐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찢어지게 가난해서 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가난에 처한다면 먼 미래를 계획하거나 고상한 취미활동 같은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하루 동안의 먹고 살 길을 찾아 다녀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심령이 가난한 것은 영적으로 절박한 위기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 생명이 위기에 처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자신의 영혼이 거지처럼 궁핍한 상태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얼마이든 그것이 자기 영혼의 빈곤을 이겨내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만듭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가난을 부정적인 육체의 고통으로 깨닫습니다. 굶주림과 피곤과 불편이라는 고통이 해결되지 않을 때 가난을 느낍니다. 그런 고통을 통해 가난을 뼈아프게 인식하는 것처럼, 돈과 음식 같은 육체적 자원이 없음을 절실히 느끼고 서러운 것처럼, 우리 영혼의 필요는 우리의 영혼에 닥친 고통을 통해 깨닫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심판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예상하면서 우리 영혼 앞에 닥친 위기, 필요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을 판단하는 분 앞에서 자신의 영적 파산을 깨달을 때, 죄밖에 없음을 직시할 때에 우리는 심령의 가난을 느낍니다. 이 땅에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을 주께서 판단하실 때에 우리는 죄로 망할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풍요가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능력을 베푸실 때 많은 무리들이 자신의 육체적 혜택을 기대하고 호기심 거리로 여겼지만 사실 이적들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이지 보여주는 예고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베푸신 이유는 자기 자신이 죄인들의 구주이고, 세례요한이 말한대로 가까이 온 천국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대로 밭에 숨겨진 보석, 모든 것을 다 팔아서도 얻어야 하는 천국을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바라보는 자는 그것에 마음이 빼앗겨 세상의 어떤 것도 심령의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게 된 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이 세상과 비교가 안 되는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을 보기 때문에 아직 자신이 머물러 있는 이 세상과 자신 속에서 결핍과 허망함을 느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래서 복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 가운데 역사하셔서 구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된 이유는 심령의 가난함을 유지해야만 천국에 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이미 천국을 허락하신 것 때문에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풍성하고 완전한 나라로 자신을 인도하실 것을 믿지만 여전히 자신은 영적으로 빈털터리고, 허망한 자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부요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그의 나라에만 있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그것을 소유하기 까지 성도는 가난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없는 것, 땅이 없는 것, 힘이 없는 것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위축되고, 절망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육적으로도 별 볼일 없고, 영적으로 파산한 자임을 알기 때문에 곤고함과 궁핍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직 예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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