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난받는 소금과 빛 (마 5:13-48)

따뜻한 진리 2017. 11. 12. 23:42

마태복음 5:13-48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는 팔복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소금과 빛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이라는 용어는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들 중 전도사’, ‘구원처럼 세속화되어 사용되고 있어서 세상에 필요한 존재’, ‘세상을 이롭게 하는이라는 뜻으로 이해되곤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뜻 중에 그런 의미가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용하신 소금과 빛의 의미는 세상에 가치 있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소금과 빛이 그 고유한 속성을 결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소금이 당연히 짠맛을 내는 것처럼, 빛이라는 것은 가리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하기 때문에 그 독특한 정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고난당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소금과 빛을 이해하는 대로 훌륭하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드러나라는 뜻이 아니라, 거룩한 삶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증거 때문에 자신이 예수와 관련 있는 사람임을 남들이 알아챌 수밖에 없게 되는 일이 제자의 특징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6절에서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고 세상이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자기 사람들의 구체적 삶, 16절이 말하는 착한 행실’,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근거해서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을 깨뜨리시면서 더욱 율법의 근본적이고도 높은 수준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과 관계된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사랑 이렇게 여섯 가지를 예로 드시면서 너희가 이런 수준으로 지키면 된다고 알고 행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건대 이 정도까지가 아니면 지킨 것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할 수 없고, 상대에게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이성에 대한 육체적인 접촉만이 간음이 아니라 음욕을 품는 것 자체가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타당한 사유가 있으면 이혼해도 되는 줄 알지만, 이혼은 자신과 상대방을 간음하게 만드는, 죄를 연쇄적으로 짓는 일이므로 이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맹세한 것을 지키는 것이 착한 것이 아니라 맹세를 하는 것, 자기를 믿게 만들려고 다른 말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피해를 입은 대로 복수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권리를 주장하지 말고 은혜를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도덕과 법의 테두리 속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살기 때문에 자기에게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본문 말씀에서 지적하신 유대인들의 자만 상태가 우리의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결코 자신의 선함에 대해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을 요구하십니다. 자기 죄를 끊임없이 미워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충분하다고 여기지 못하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없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거듭난 자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삶을 살게 될 때, 그는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그 사람이 주는 고통보다 그런 악한 마음을 품는 자신 때문에 더 괴로워해야 하고, 남들 같으면 벌써 이혼했을 나쁜 배우자와 관계를 끊지 못하고 계속 참고 살아야 하고, 생존을 위해 쉽게 거짓을 말하는 세상 속에서 진실하려고 하면서 바보 같아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고,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계속 웃어줘야 하고, 나를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고 괴롭히는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고 돌봐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면 정말로 사람들이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칭찬해줄까요? 반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삶을 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뭐라고 말할까요?

 

    사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보다 그냥 율법적인 수준으로 사는 것이 현실적인 고통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수준으로 살게 될 때 우리는 거룩해진 자신에 대해 흡족하기 보다는 고통이 심해질 것입니다. 부패한 자신의 죄와 계속 씨름해야 하기 때문이고, 또 모든 것을 참고 용서하고 사랑하려다가 상대에게 이용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났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수준으로 살게 됩니다. 외형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자기에 대해 만족하지 않고, 남이 알지 못하는 자기 안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근심하게 될 것입니다. 태어날 때 가진 자신의 본성으로는 원수는커녕, 자기가 좋아서 선택한 배우자, 그리고 형제까지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세상사람 모두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수준의 도덕과 사랑을 실천한다면 좋겠지만 외롭게 혼자 그런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팔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런 거룩과 사랑을 자기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