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7:1-27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과 몸에서는 빛이 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세는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자로서 유대인들이 하나님 다음으로 경외하는 존재였습니다. 또 엘리야는 핍박받았던 선지자들의 대표인데, 제자들은 심판 날이 다가오면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당시 서기관들의 가르침 때문에 곧 심판이 다갈 올 것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산에서 있었던 일을 자신의 부활 때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방금 산에서 엘리야가 임했었기 때문에 곧 심판의 날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왜 예수님이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고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대했던 세상의 종말로써의 심판의 때가 아닌 자기가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보여주는 심판의 때를 깨닫도록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예비하기 위해 세례요한이 이미 왔던 것이고, 예수님 자신도 그렇게 고난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시는 신비스런 장면을 제자들에게 보이신 목적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의 역할처럼 예수님께서 모세를 능가하는 대표자로서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시는 것과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고난당했던 것 이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드러내시다가 죽임당하신다는 차원에서 그 두 인물을 만나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그런 의미를 당시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엄청난 두 인물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 함께 있는 것을 보면서 놀랐고, 그중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을 짓고 거기서 머물자고 예수님께 제안합니다. 그 때 갑자기 구름이 하늘을 덮고 소리가 났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었습니다. 제자들을 두려워서 벌벌 떨었고, 모세와 엘리야는 온데간데없이 예수님만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짓겠다고 한 것은 나름 모세와 엘리야를 환영하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여전히 알지 못하는 태도였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동행해 온 예수님이 누구시길래 죽었던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내시고 이런 놀라운 장면을 경험케 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보다 모세와 엘리야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어디든 따르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난 장소에서 신비한 경험을 계속하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제한하고 붙잡아두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관심사에 이끌리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어서 귀신 때문에 간질병이 있는 아들의 부모가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 부모는 먼저 제자들에게 낫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고치지 못했다고 실망하면서 예수님께 다시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것이 그 부모와 무리들에게만 하신 말씀인지, 제자들을 포함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진노 중에도 그 아이를 치료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왜 자신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는지를 예수님께 물었고, 예수님은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옮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분명 무엇인가를 믿고 치유를 베풀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제자들에게는 겨자씨만큼의 믿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이 얼마나 강도가 센지, 믿음의 양이 많은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본질, 즉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믿는 것과 자신들에게 능력을 주신 이유가 주님을 드러내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에 목적이 있음을 알고 믿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성전세에 관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 부분은 그리스도인이 정부에 세금을 내고, 정권에 순응해야 할 근거로 해석되곤 합니다. 물론 그런 적용이 본문의 메시지 중 일부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중요한 내용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와 예수님이 자신을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가르쳐주셨다는 것입니다. 24절에는 성전세를 걷는 세리들이 베드로에게 스승인 예수님이 성전세를 안 내느냐고 묻습니다. 본문에서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세금을 내셨는데, 베드로가 그것을 미리 예상하고 세리에게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실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저 스승인 예수님이 세금을 안 내서 흠 잡히는 것을 예방하려고 세금을 내실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성전보다 높으신 예수님을 알았다면 세리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세리가 어떻게 여기든 베드로는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실 분이 아니라고 대답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해가 베드로에게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생각이 어떤지 질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실 이유가 없지만 세리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고 세금을 내실 것임을 제자들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에게 대해 더 잘 알게 하시려고 인내하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세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것, 믿음 없음을 지적하시면서 가르치신 것, 성전세에 대해 질문하신 것은 제자들의 성장을 위해서였습니다. 그 성장은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것과 직결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산에서 놀라운 경험을 했지만 예수님보다 모세와 엘리야를 신비롭게 여겼고, 내려와서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음이 드러났고, 성전보다 높으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음을 드러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이 기름부음 받은 자 중에 가장 높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보다 높으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신지를 지속적으로 사랑으로 가르치셨고 경험을 통해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연결되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 시간만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늘어가고 있습니까? 말로는 예수를 강조하지만 다른 것들에 쉽게 열광하고, 다른 것으로 확신을 얻으려 하고, 다른 것을 믿음이라고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신앙의 활동들이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신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으면서 교회만 오래 다니는 것이라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깊고 풍성하게 알아가고 있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나아가 그것이 예수님을 의존하는 믿음, 예수님을 추구하는 믿음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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