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어린 아이 같은 우리 (마 18:1-14)

따뜻한 진리 2018. 3. 25. 22:37

마태복음 18:1-1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가르치시고, 앞의 성전세 사건에서는 예수님이 자신과 제자들을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왕의 아들들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계속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왕이 되시면 자신들이 왕의 아들들처럼 높아질 줄 알고 서로 서열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한 명을 제자들 사이에 세우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낮춰야 한다.’, ‘어린 아이를 영접해야 한다.’, ‘작은 자를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한다.’, ‘한 마리 양과 같은 작은 자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본문에는 어린 아이가 많이 언급됩니다. 그래서 어린이주일 같은 때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특별히 여기신다.’, ‘어린 아이들에게서 배우자.’는 내용으로 본문이 설교 되곤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어린 아이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어린이의 특성이 믿음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 어린 아이가 죄가 없고, 깨끗하고, 겸손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누구에게도 존경을 받거나 부러워할만한 힘과 지위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사용해서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싸우고 있는 서열과 권력 같은 것과 전혀 무관하고, 그런 것을 얻을 자격도 없는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 하나님 나라 백성은 누가 봐도 대단한 것이 없는 어린 애처럼 별 볼일 없는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되는 것은 무슨 권력을 부리고 뽐내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 얻는 것, 성도가 되는 것은 세상의 어떤 귀한 것을 얻는 것보다 큰 혜택을 입는 것이지만 그것이 나를 남보다 더 높고, 탁월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 못 받은 자들을 우습게 여기고, 나보다 신앙이 안 좋아 보이는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우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높은지 낮은지를 비교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내가 예수 오래 믿은 것, 예수님과 얼마나 더 가까운가, 얼마나 더 잘 믿느냐가 저들보다 나를 높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구원하시고, 복음전도를 위해 특별한 능력과 권한을 주셨지만 그것들은 그 자신들을 우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분한 은혜에 어쩔 줄 몰라 벌벌 떨면서 주님을 위해서 일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서로 자기가 높다고 싸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다양한 은혜와 특권과 칭호와 약속들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은혜들이 내게 걸맞지 않다는 생각, 감당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과 두려움 때문에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는 특권의식에 빠지지 않고 다른 예수 믿는 사람,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을 기꺼이 영접, 환영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우리 공동체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의 여부로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경고대로 공동체 안에서 실족하는 일이 왜 발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만과 세속적 기준이 침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을 가지고 자기 자랑을 하고, 세상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자기 잘난 것 인정받으려 하고, 자기 세력을 모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싸운 것이 그런 일입니다. 10절 내용대로 업신여기는 무시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린 아이처럼 드러낼 것이 없는, 그리스도 이외에 자랑할 것이 없는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공동체, 교회가 그런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이미 그런 문제를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7절에서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죄로 인한 고통을 겪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서로의 죄로 인해 우리는 연단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허용하셔서 선을 이루시지만 그러나 우리는 자기의 죄에 대하여 그런 합리화를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의 구원을 방해하는 행위, 하나님과 복음과 구원과 교회에 대하여 다른 지체가 실망하게 하는 것은 분명 무거운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대를 실족케 한 몸의 부분을 잘라내어서라도 영원한 불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낫다고, 실족시키는 자의 위험을 불신자가 처할 지옥으로 경고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12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양 백 마리 비유는 교회 밖 전도를 말하기보다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어떻게 여길 것인가를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인 우리 서로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자들로 믿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자들은 끝까지 거짓 신앙을 가진 채로 살다가 배교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갖고 있게 된다면 앞에서 말한, 상대를 실족시킬 만한 우리 자신의 문제점들에 대해 민감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습관적이고 부주의한 악행과 고의적인 죄 때문에 누군가 실족하면, 그 사람이 너무 쉽게 인간적인 상처를 입는다고, 신앙이 견고하지 못해서 은혜로 넘어가지 못하고 사람의 잘못만 본다고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런 자가 교회를 떠나거나 잃은 양이 되면 그 사람의 책임으로 쉽게 결론 내리는 잘못을 범하는데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겸손하게 가르쳐도 떠날 자들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입니다.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나 사람을 통해, 서로를 통해 구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할 수 있도록 주의하고 겸손하게 섬기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