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님의 떡 이야기 (마 15:21-16:12)

따뜻한 진리 2018. 3. 4. 15:34

마태복음 15:21-16:1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이방인들의 동네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딸이 귀신 들렸으니 낫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여인의 간곡한 부탁에도 예수님이 반응을 안 하시자 제자들은 그 여자를 보내시라고 예수님을 재촉했습니다. 23, 24절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그 여자의 문제를 빨리 해결해주셔서 조용해지게 해달라는 뜻으로 그를 보내소서라고 제자들이 말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부탁마저 거절하는 의미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이 그 여인의 부탁을 안 들어주실 것 같으니까 그 여인을 그냥 빨리 돌려보내시라고 말한 것인데, 예수님 역시 그 여인에게 나는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자들에게 보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면서 분명하게 거절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해석이든지 예수님은 그 이방 여인이 들으라고 거절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물론 그 거절은 그 여인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방여인이 예수님 앞에 엎드리기까지 하면서 더 매달리자,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해서 개들에게 줄 수 없다라는 말까지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민의식, 우월의식을 가지고 자기 종족들을 배제하고 있다는 모욕감을 느끼면서, ‘예수 이 사람도 별 수 없구만하고 뒤돌아 설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라는 표현을 자기에게 그대로 적용해서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는, 예수님을 그래도 신뢰한다는 겸손과 간곡함이 녹아든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 딸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호수 근처 다른 지역에 가셨습니다. 거기서 여러 병자들을 치료하셨고,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 사건은 앞의 본문 1413절부터 나오는 이야기와 매우 비슷합니다. 그러나 두 사건은 서로 다릅니다. 마가복음 6장과 7장에도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신 일과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이 구별되어 기록되어 있어서 이것을 참고하면 유사해 보이는 이 두 기적에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은 그 대상이 유대인들이었던 반면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은 이방인들이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후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이 땅에 오셔서 이방인들에게도 배불리 먹을 것을 주셨던 것입니다.

 

    16장에서는 다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함께 예수님께 와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의 요청은 예수님을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시험하고 책잡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온 자임을 믿을 수밖에 없는 매우 극적인 증거를 보여달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요나의 기적, 즉 자신의 죽음과 부활 밖에는 다른 증거가 없음을 암시하셨습니다. 자신들의 권력과 자존심을 위해 고의적으로 진리를 반대하고 듣지 않는 자들은 죽었던 사람이 깨어나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이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실 때 누룩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셨는데, 여기서는 누룩을 떡 전체에 퍼지는 것을 악한 것, 곰팡이가 음식 전체에 퍼지고 덮어버려 상하게 하는 것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본문은 떡이라는 매개를 가지고 연결된 이야기들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떡을 뗄 때 정결예법을 무시한 예수님을 불결하게 여겼지만 이방여인은 예수님이 주시는 떡의 부스러기라도 받기를 원했고, 사천 명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손에서 나온 기적의 떡을 먹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신하고 깨끗함을 자부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가장 정결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먹어야 할 진정한 떡이신 예수님 자신,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구원을 거절했습니다. 이미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깨끗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정결예법을 지키지 않은 것,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비방했지만 정말 더러운 것,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의하고 피해야 할 것은 그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오염된 상태로 여겼지만 정말 더럽게 오염된 것은 그 자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불신과 교만은 자신들을 오염시켰고, 자기들 주변까지 오염시켜서 불신의 상태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여인은 어떻습니까?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불결하게 보신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떡이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개들에게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와 같은 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인격적인 분이심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그런 이해가 있었기에 모욕적인 예수님의 표현을 즉시 자기에게 적용해서 은혜를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자신의 비천한 처지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에 눈 먼 분이 아닙니다. 아무나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스러운 줄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아닙니다. 이방여인이 개 취급 받았던 것처럼 우리는 저주 받아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이방여인이 주님의 판단을 인정했듯이 우리도 주님이 나를 어떻게 여기시든 그것은 타당한 것임을 인정하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기에 합당한 자가 아닙니다. 구원은 마치 우리가 잃어버렸던 내 물건을 찾는 것처럼 마땅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싶어서 안달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선심을 쓰듯 구원을 받아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여인을 거절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우리를 거절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얼마든지 거절하시고 지옥으로 보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악한 죄인임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가운데, 일말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엎드리는 것이 믿음의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고, 믿음을 형식적으로 시인한다고 해서 자동적, 기계적으로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구원하려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 주님을 인격적으로 여기면서 은혜를 구하는지 시험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동안 하나님이 우리를 거절하시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나를 그렇게 대하실지라도 하나님은 그럴 자격, 권리가 있으신 선하신 분이심을 끝까지 신뢰하는지를 물으십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