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죄를 드러내는 것과 용서하는 것 (마 18:15-35)

따뜻한 진리 2018. 4. 1. 18:08

마태복음 18:15-3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교회 공동체에도 죄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의 죄와 교만 때문에 다른 영혼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을 내세울 것 없는 어린아이로 여겨야 하고, 다른 지체들도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처럼 배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서로를 실족시키지 않도록 상대를 실족케 한 몸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이 낫다는 경고를 통해서 주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는 죄 문제가 항상 생기기에 예수님께서는 죄를 다루는 실제적인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은 죄를 드러내는 것과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15절부터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전 당사자에게 직접 말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적하는 와 죄 지은 상대 모두가 더 큰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상대의 죄 문제를 외면할수록 미움만 깊어져 뒤에서 험담하게 되고, 또 다른 오해와 소문을 만들어내 죄를 증폭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먼저 개인적으로 죄를 다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개인적인 반성의 기회를 주었는데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상대의 잘못에 대한 지적이 나 한 사람의 편견이 아니라 객관적인 죄임을 인식시키기 위해 여럿을 동참시켜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교회가 죄를 다뤄야 합니다. 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모였을 때만 계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도 개인의 삶과 많은 성도가 모이는 예배에 늘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공동체 안에서 죄를 다룰 때 더 힘써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죄를 다루는 일은 공동체에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죄를 다루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고, 공론화 될수록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감정이 아닌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것, 주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바르게 잘 다루면 그 공동체가 더욱 성숙할 수 있고, 만약 덮어버리거나 잘못 다루면 또 다른 죄가 파생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619절에서 말씀하신 천국열쇠 비유를 18절에서 또 말씀하시면서 교회가 성도의 죄를 다루는 문제가 매우 중요한 영적 싸움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잘못한 자의 죄를 다루는 데도 불구하고 계속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추방하라고,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대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밖으로 쫓겨나는 것을 출교라고 하는데 이것은 죄지은 당사자를 교회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로부터 차단하는 것입니다. 출교 당한 자가 정말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영혼에게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출교를 통해 그는 고통을 경험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죄에 대해 무감각할 뿐 아니라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메마르게 되는 것에 대해서도 별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교회에서 나오게 된 것을 더 잘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출교는 교회가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징벌인 동시에 은혜를 얻게 하려는 최후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출교한 자들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이방인과 세리가 구원과 무관한 자들로 여겨진 것처럼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는 구원과 무관함을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인과 세리가 정죄 받는 대상들이었지만 오히려 주님이 긍휼이 여기시는 대상이었고, 그들 역시 겸손하게 주님께 반응했던 자들임을 생각할 때 출교는 죄인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죄를 다룰 때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죄를 드러내는 목적은 바로 잡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용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적하고 드러내기로 한 그 죄 뿐 아니라 죄를 다루는 과정에서 상대가 보이는 잘못된 태도까지도 용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몇 번을 용서해야 할지 묻습니다. 당시 랍비들의 기준에 따르면 세 번까지만 용서할 기회를 주면 되는데 베드로는 일곱 번 정도 용서해주면 되겠냐고 물으면서 나름 관대함을 자랑하려 했는데,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씩 490번이나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제한을 두지 말고 계속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을 면제받은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 진자의 것을 악착같이 받아내려고 하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약 3개월 치 수입이고, 일만 달란트는 약 16만년 정도를 일해야 벌 수 있는 수입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받은 은혜에 비해 지극히 작은 은혜를 베푸는 일에도 인색합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는 말 그대로 거저 받았으니까 그것을 베푼 상대가 어떤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면서 자기에게 베푸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은혜를 베풀어야 할 때는 자기가 감수해야 하는 손해와 고통을 크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은혜를 베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시는지를 아는 자라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큰 희생으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안 믿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거라고 기대할 수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죄사함 받았다는 우리의 믿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죄를 드러내는 것과 용서하는 것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하나 쉽지 않습니다. 죄인인 우리의 본성은 죄를 드러내는 것도, 용서하는 것도 힘들어 합니다. 죄를 다루는 것이 왜 어렵습니까? 우리가 지적하는 입장에서 사람들이 잘못을 잘 인정하지 않고, 또 인정해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지적받는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아무리 조심해서 나의 잘못을 알려줘도 나의 기분이 나쁘고 미운감정이 생기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죄를 정직하게 드러내기보다 회피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기 원하지만 자기 죄는 건드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것을 아는 교회들은 점점 죄를 바르게 다루지 않습니다. 더 이상 권징을 하지 않습니다. 권징을 해도 다른 교회로 옮겨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에 교회들은 죄를 다루기보다 교인들을 어르고 달래서 붙잡아두기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덮어두고 그냥 다 받아주고, 좋게 넘어가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죄를 다루는 방법이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죄를 다루고 용서하는 것이 교회 안에서 성도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나의 죄를 다루는 것이 나를 괴롭히고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것이고 은혜를 얻는 길인 줄을 성도 모두가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바른 복음이 선포되고 성도들이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경험하면서 구원 얻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아니라면 차라리 죄를 덮어두는 것이 현실적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를 깨닫는 것과 은혜의 복음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분의 것이기 때문에 참된 교회를 추구하는 성도들이라면 그것을 회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죄를 다루는 것이 지적하는 자나 지적당하는 자에게 모두 힘든 일이지만 모두가 주님 앞에서 서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거짓된 은혜로 위장하지 않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하게 누리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