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자청년과 제자들 (마 19:16-30)

따뜻한 진리 2018. 4. 15. 19:07

마태복음 19:16-30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 청년은 칭찬 받는 부잣집 모범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온 이유가 그렇게 괜찮은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정말 영생을 얻고 싶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예수님께 무슨 선한 일을 더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영생, 구원은 선행이 아닌 오직 은혜로,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얻게 되는데, 예수님은 의외의 답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영생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 중 이웃에 대한 계명인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고, 거짓 증언 하지 말고,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청년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는 그런 계명을 다 지켜왔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 십계명을 주신 것은 사람이 자기 죄를 다스려 착하게 살면서 좋은 사회를 이루게 하는 목적도 있지만 율법을 통해 죄인인 자신을 깨닫게 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리공부 할 때 잠깐 다루었지만 구약 율법을 주로 금지조항으로 명령하신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무언인가를 하지 말라는 금지가 사람의 본심을 진단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금지된 것을 위반하지 않는 것이 자기가 해야 할 전부라고 생각하고 남을 해치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는 자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이미 허락하고 계신지, 나를 사랑하시는 지에 대해 눈이 안 떠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자기희생적 사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 대로 적극적인 사랑을 해야겠다는 노력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금지를 지키는 일도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에 있어서 거짓된 신자와 참된 신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거짓 신자는 얄팍한 자기만족으로 확신과 만족을 얻고, 성도는 율법이 요구하는 소극적 금지와 적극적인 선행 이 두 가지 모두 속에서 자기 한계를 발견하면서 끝까지 은혜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심을 알면 우리는 자기희생적인 사랑과 용서도 어렵지만 미움과 간음과 살인의 동기가 우리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기 때문에 슬픔을 겪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겉으로 드러나는 행실이 그럴 듯해도 마음 속이 청결하지 않으면 소용없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모두 알고 계심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금지명령을 겉으로 어기지 않은 것이 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이 착각 속에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이 어떤 계명을 지키면 되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 지켜야 할 또 다른 계명을 가르쳐주신 것은 정말 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 아니라 역으로 자신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재산을 처분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요구를 힘들어 하는 자신을 통해 자신이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존하지 않았음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율법적으로 흠 없는 자기를 숭배했습니다. 재물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그 청년은 물질과 함께 그런 자기 사랑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데 그냥 돌아갔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재산을 처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모든 재산을 버려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은 부자일수록 자기만족과 세상 즐거움에 빠져 자기 영혼에 닥친 절망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가난한 자보다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난한 자라도 자신의 영적 비참을 보지 못하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똑같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부자일지라도 영적 빈곤에 직면하게 하시고, 가난한 자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풍요를 발견하게 하시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2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청년에게 요구하신 말씀, 재물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는 것을 이미 자신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임을 발견하면서 하늘의 보상으로 무엇을 얻게 될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영광과 이 땅에서 희생한 것과 비교가 안 되는 복을 영생과 함께 얻게 될 것이라고 칭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제자들의 기대를 뒤집어 버리는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빠져 있었던 자기만족에 제자들 역시 빠질 위험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참 괜찮은 자기를 인정받으려고 한 것처럼, 제자들 역시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하늘의 보상을 기대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주님께서도 자기를 따르고 순종하는 자를 통해 기쁨과 영광을 얻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탁월한 것을 깨닫고, 선한 일을 하고, 귀한 것을 포기하면서 주님을 따를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남보다 더 가치 있게 해주거나, 구원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보장해 주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괜찮은 나, 칭찬 받을 만한 나를 만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공로의식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찬양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만하기 쉽고, 나보다 잘 못하는 사람을 보면 우쭐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자신이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한 말, 또 누가복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말하라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