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이혼문제에 답하신 예수님 (마 19:1-15)

따뜻한 진리 2018. 4. 8. 16:19

마태복음 19:1-1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 유대지역에서 병자들을 고치고 계실 때 바리새인들이 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은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옳은지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명기 241절에 수치가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 수치를 어떤 것으로 해석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명기 24장은 인간의 사랑이 변질되는 죄성 때문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양보한 임의의 규범이지 혼인 관계를 파기할 수 있는 권리조항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창세기 127절의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과, 224절의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라는 말씀을 근거로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사회가 수십 년 전부터 법률상 이혼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이혼문제가 최근 들어 심해진 것 같지만 혼인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인류에게 오래 전부터 있어 온 문제입니다. 법률상 이혼이라는 것이 없었을 때에도, 또 상대를 꼭 버리지 않더라도 다른 배우자를 들임으로써 사실 상 혼인관계를 깨뜨리는 일들은 역사 속에 항상 있어왔습니다. 특히 힘과 경제력을 가진 남성들이 다양한 이유를 들어 일부일처제의 관계를 깨뜨려왔습니다.


    아브라함도 일부일처를 위반했고, 다윗도 그렇습니다. 창세기에서 일부일처제를 기록한 모세가 신명기에서 백성들에게 이혼을 허용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지만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타락한 인간들의 완악함 때문에 이혼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용하셨다고 해서 모두 선한 것은 아닙니다. 죄임에도 불구하고 허용하시는 것은 일종의 심판이기 때문에 많은 자들은 허용된 틈을 넓혀가면서 죄를 즐길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처럼 허용된 죄의 길 속에서 방황하다가 회개하고 돌아올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은 거의 희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용이한 선택지로 두어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 혼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선적인 하나님의 뜻임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목사나 판사나 이혼 하려는 그 당사자나 어떤 사람도 나누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혼하고 혼자 살거나 재혼을 해서 훨씬 행복해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닌 것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혼인관계를 지키는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이유는 혼인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한 번 성도 삼으시면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함께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면서 결혼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혼인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갈등이 커지지 않도록 용서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신앙이 있는 자가 더 많은 희생과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결혼이 주는 그런 고통과 속박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회피하고자 이혼을 하기도 하고, 나름 영리하게도 결혼을 아예 안 하려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물었습니다. 그렇게 혼인관계 속에서 배우자에게 죄 짓고, 또 이혼으로 죄 짓는 일을 안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일인데 차라리 혼인을 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타고난 자,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육체적, 영적 굴레를 주신 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를 피하겠다고, 고통을 피하겠다고 결혼을 안 하면 더 큰 죄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13절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려오자 제자들이 꾸짖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천국이 이런 어린 자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단지 어린 아이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말하려고 마태가 기록했기보다는 앞의 혼인과 이혼에 대한 내용과 연속된 교훈을 위해서 기록된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은 유아세례나 어린 아이들의 구원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근거가 되는 본문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남녀가 혼인하게 하신 목적 중 하나는 자녀를 낳아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남녀는 가정을 거룩한 혼인 관계 속에서 지켜가면서 자녀들을 양육하고 구원받도록 돌봐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데, 죄인인 인간은 그런 구원 목적에 순종하기보다 자기 쾌락과 편리를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것들을 깨뜨립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정확하게 하나님이 금지하신 쪽으로 갑니다. 혼인관계를 성결하게 지키기보다 이혼과 재혼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으로, 성적 쾌락은 개인의 자유인 것으로 추구되고, 결혼은 사치고 육아는 고통일 뿐이라는 생각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차라리 혼인제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물은 것과 아이를 성가신 존재로 여긴 것은 인류가 이기적으로 자기 행복을 추구하면서 드러내 온 태도입니다. 오로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고 싶은 인간에게 결혼이 주는 구속, 배우자로 인한 고통, 생명에 대한 책임은 피하고 싶은 굴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혼인과 가정과 양육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혼인관계와 가정, 자녀에 매여서 자기 사랑에 빠지지 않고 이타적 헌신을 조금이라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남녀는 자신들이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결혼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내하고 서로에게만 헌신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추구하게 됩니다. 때로는 내가 사랑해서 선택한 상대가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순간들도 겪지만 그 관계를 깨뜨리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혼인으로 묶으신 것입니다. 그런 혼인과 가정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품으시는 신실한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혼인 관계를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생각해야 하고, 지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