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4:32-25:13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종말과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무화과나무가 봄에 잎사귀를 내면 누구나 곧 여름이 다가오는 줄 알게 되는 것처럼 여러 가지 징조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 알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또 종말 때에 사람들이 보여줄 삶의 태도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심판 때를 준비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면서 아무런 위기의식 없이 살 던 것처럼 마지막 때도 그럴 것입니다.
또 그 때는 여느 때와 같이 사람들이 밭에서 일하고 집에서 맷돌질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데려가고, 어떤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그 날이 임할 것입니다. 또 도둑이 어떤 집을 털겠다고 주인에게 어떤 예고도 하지 않고, 주인은 어떤 짐작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갑자기 예수님은 재림하실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맡겨진 사람들을 잘 돌볼 것이지만, 악한 종은 주인이 오려면 한 참 멀었다고 생각하면서 맡겨진 사람들을 학대하고 자기 쾌락을 일삼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않은 날, 갑작스런 시간에 주인이 와서 그 악한 종에게 벌을 내리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오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을 맞으러 간 열 처녀는 들러리들로써 신랑 신부를 축하하기 위해 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슬기로운 자들은 신랑이 늦을 때를 대비해 어둠을 밝힐 등과 기름을 함께 준비했지만, 미련한 자들은 등만 준비했습니다. 신랑이 예상보다 늦자 처녀들은 피곤해 졸았고, 신랑이 곧 온다는 소리를 듣고 나가려 했지만 등불을 밝힐 기름이 없는 다섯 처녀는 그제야 기름을 구하러 갑니다. 그 사이에 신랑이 오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앞의 24장 1절부터 31절까지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32절 부터인 이번 본문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종말의 두려운 징조와 자신이 오실 때의 현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셨습니다. 무서운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징조들로 재림의 때를 예상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본문에 있는 내용들은 반대입니다. 무서운 징조들, 바짝 긴장하게 되는 요소들이 없습니다. 또 상황과 현상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사람들의 기다림의 태도에 대해 말하는 비유들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의 변화에서 느껴지는 자연스럽고 평범한 진행, 노아 시대 사람들이 어떤 긴장도 없이 자신들의 삶을 계속 살아갔던 것, 생계를 위해서 밭에서는 남자들이 일하고 집안에서는 여자들이 맷돌질을 하는 것, 어느 누구도 도둑이 올 것을 예상하고 긴장하지 않는다는 것, 악한 종이 주인이 곧 올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느긋하게 자신의 악을 저지르는 것, 신랑을 기다리면서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닫힌 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다섯 처녀들이 그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계속 늦어지니까 고난 속에서 지치고 실망해서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게 되고, 어떤 이들은 분명한 징조가 없으니까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면서 기다리지 않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다가 아무 준비됨 없이 당황스럽게 종말을 맞이하는 것을 본문이 묘사합니다. 흔히 우리는 지난 시간의 본문이 말하듯 두려운 징조가 있을 때에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고 생각들을 하는데, 반대로 어느 때보다 평안하고, 일상 속의 기쁨과 재미를 누리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운 징조와 평범한 일상은 무뎌짐과 안일함 속에서 함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망할 것 같은 무서운 일들이 일어날 때가 예수님이 오시는 때가 아닐 수 있다면, 그러면 앞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그 때에 일어날 두려운 징조들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꼭 무서운 전쟁과 비극이 극에 달할 때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까지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과학과 문명이 발전된다 해서 인간들이 드디어 유토피아를 이룰 것 같은 기대를 하게 될 때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환란은 어디선가 계속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극적 현상을 묘사하신 이유는 꼭 그때 종말이 있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환난의 두려움과 고통 때문에 거짓에 미혹되지 말고 끝까지 견디고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본문의 비유들이 전제하고 있는, 주님이 지금은 안 오시고 나중에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평화로운 일상, 무서운 징조가 없어서 긴장을 안 하게 되는 때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현세에 대한 만족,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주님이 안 오시니까 점점 기다리지 않게 되고, 세상이 안정되고 살만해지면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소망하지 않습니다. 주님 오실 날이 멀었다고, 아직 기회가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면 나태함과 쾌락에 빠지고 불순종하는 자신에 경각심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이 당장 망할 것 같은 두려운 종말의 징조와 반대로 평화로운 일상이 지속되는 것 중 어떤 것이 우리에게 더 위험할까요? 둘 다 위험합니다. 세기말적 공포 때문에 사람들이 시한부 종말론과 거짓 메시아에 미혹되는 일 만큼이나 세상의 즐거움과 자아도취에 빠져 주님을 기다리지 않는 것 모두 위험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은 종말 때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실 날까지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그 반복 속에서 거짓 신자는 두렵고 불안한 상황이 될 때마다 불경건한 삶을 만회하려는, 어리석은 막판 뒤집기를 하려다가 미혹 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 태평한 상황이 되면 나태함과 쾌락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는 세상 다 가진 것 같은 행복한 날에도 공허함을 느끼며 주님을 기다릴 것이고, 세상 망할 것 같은 슬픈 날에도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인내할 것입니다. 모 드라마의 명대사인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는 말처럼 성도는 모든 날이 사랑하는 주님을 붙잡고 주님 만날 날을 기다리는 데에 유익을 준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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