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주님 (마 26:31-46)

따뜻한 진리 2018. 7. 1. 23:39

마태복음 26:31-4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이제 잡혀서 십자가에 달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가랴 137절의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를 인용하셨는데,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목자인 자신을 십자가에 죽게 하실 때 그 양들인 제자들이 도망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배신과 슬픈 일 때문에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신 후 그런 제자들을 만나기 위해 앞서 갈릴리에 가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이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말하면서 예수님이 예고하신 내용들을 부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슬픈 이별 뿐 아니라 다시 만날 부활을 분명히 약속하셨는데도 베드로는 자신이 끝까지 예수님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 확신에 찬 고백이 지켜지지 않을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신 그 날 밤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이렇게 셋을 데리고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인데, 예수님이 내적으로 겪으신 고통을 그곳의 이름이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고통스런 순간을 앞두고 너무나 괴로우셨던 예수님은 기도하기를 원하셨고, 그 시간동안 제자들이 깨어서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 고난의 잔을 비켜갈 수 있기를 아버지께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는 길을 알고 계셨습니다. 죄 없는 분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자격 없는 악한 죄인들에 의해 부당하게 모욕과 폭력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온 몸으로 극한 통증들을 겪어야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음부에 내려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단지 자신이 죽게 된다는 사실만 알더라도 사람은 불안과 괴로움을 경험하는데, 예수님은 자기 몸이 겪을 것을 모두 알고 계셨기에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자기 안에서 겪으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스트레스, 불안, 공포 등을 겪을 때 일어나는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고통의 극한 수준이 예수님에게 일어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사람이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 고통을 피하길 원하셨다는 것은 그 고난과 고통이 사실이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렇지 않게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몸으로 두려워하셨고,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우리가 질병과 사고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두려워하셨습니다. 세상 어떤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는 것 보다 가장 힘들어하셨습니다. 그 사실은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과 고독 속에서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게 하고, 위로를 주며, 끝까지 견딜 능력을 제공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당하신 모든 고통은 우리 때문이었고, 우리를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통을 피하고 싶은 자기 연약함을 하나님 아버지께 정직하게, 그대로 고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사명을 아셨지만,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계획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셨고, 그것이 우선임을 고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내용으로 세 차례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재차 기도하셔야 할 만큼 예수님은 자신의 약함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다른 길을 구하셨지만 결국은 순종해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확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세 번 기도를 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어서 옆에서 함께 기도해주길 원하셨지만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함께 죽겠다고 장담을 했는데 예수님께서 막상 도움을 요구하실 때는 잠들어서 주님의 괴로움에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을 돌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드러냈습니다. 어떤 엄청난 힘과 능력으로 예수님을 도와 드려야 할 순간이 아닌, 함께 기도하면 되는 순간조차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대해 말씀하실 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믿을만한 존재임을 예수님께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확신에 빠져서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일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기가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연약하고 변하기 쉬운 존재임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자신이 흔들리고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충분히 순종할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연약함을 드러내셨습니다. 괴로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정직한 자기 인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셨습니다. 하나님 뜻을 잘 알지만 자신은 정말 피하고 싶다는 고백을 하셨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쏟아내셨습니다.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필요를 간청하는 것, 감사하는 것, 능력 달라고 하는 것도 기도이지만 순종해야 할 마땅한 요구들 앞에서 피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나의 고통과 불안, 불만, 무능함에 대한 괴로운 이야기들을 하나님께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는 태도가 드러납니다.

 

    그런 기도가 없는 신자는 자기의 영적, 육체적, 상황적 곤란함 때문에 하나님 뜻에 합당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을 스스로 합리화하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많은 것들을 구하지만 그 상태로 계속 머물게 됩니다. 정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여기는 자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능력을 달라는 내용으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토로할 내용으로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깨닫게 하신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자기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못하겠다고 말하고, 슬퍼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고, 겸손할 수 있고, 또 다른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 보다 더 낳은 상태로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우리 자신의 어떠함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은 무너질 수 있는 것임을 알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약속하셨는지에 집중합시다. 또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합시다. 그것으로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