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47-27:10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셨을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성전을 지키는 경비대 군인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스승을 알아볼 수 있는 친밀한 제자 유다가 그 무리 속에서 나와 예수님께 인사를 했습니다. 50절에는 예수님이 유다에게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이 그것을 실행할 유다에게 역설적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마치 어린 자녀의 행동을 다 읽고 있는 부모가 ‘얘야 너는 무엇인가를 하러 왔지?’라고 물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하려는 일이 일어나도록 하셨고, 유다의 신호를 알아챈 군인들은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를 붙잡으려는 한 사람에게 칼을 휘둘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행위를 막으셨고, 귀가 잘린 자를 치료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열 두 군단, 즉 당시 군대 단위로 7만 2천의 천사를 동원할 수도 있지만 성경이 예고한 대로 자신이 잡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잡히는 일을 베드로가 막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려는 자들에게 ‘내가 성전에서 날마다 가르치던 날에는 너희가 나를 잡지 않다가 지금 이렇게 잡게 된 것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루려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셔서 잡히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한 명분을 자백받기 위해 심문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부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면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요2장)라’는 말을 성전 건물로 이해해서 성전모독으로 여겼습니다. 대제사장은 그런 성전모독과 신성모독에 대한 자백을 얻어내려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도 말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말한대로다.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고, 심판자로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내용을 평소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는데,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명분을 얻도록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격분을 하면서 사형을 받을 만한 자백이라고, 다른 증거는 더 필요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빈약하고 공정하지 않은 판결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아보는 자들의 질문을 세 번 받지만 첫 번째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두 번째는 맹세를 하면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째에는 저주와 맹세를 하면서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판 것에 대한 후회로 자기가 받은 은 삼십을 종교지도자들에게 반납하려 했지만 그들은 불의한 돈을 거둬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그 돈을 성전으로 던지고는 자살했습니다.
유다가 배신한 이유는 단지 돈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사탄이 들어가서 그런 것이지만 그 사탄이 유다를 로봇처럼 조종해서가 아니라 유다가 가진 생각을 사용해서 죄를 짓게 한 것입니다. 유다의 죄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가 가진 능력을 허비하고 십자가에 죽겠다고 하니 유다가 예수를 일부러 궁지에 빠지게 해서 초월적 능력을 사용하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즉 유다는 예수가 체포될 때에 신적 능력을 발휘해서 상대들을 제압하고, 본격적으로 힘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힘으로 독립시킬 것을 의도했을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죽게 하려고 판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한 것입니다. 이 견해는 매우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고, 내가 아버지께 열 두 군단의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고 말씀하신 것도 베드로와 유다의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 하나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수동적으로 당하신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가능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들은 형편없는 모습들을 드러냅니다. 유다는 자신을 사랑한 스승을 팔아버렸고, 종교지도자들은 거짓 증인들을 매수했다가 증거와 명분을 못 찾아서, 어떻게든 사형판결을 신속하게 내리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들은 인간 사회에서 매우 고귀하게 여겨지는 법집행을 매우 비열하고, 천박하고, 어설픈 것이 되게 했습니다. 또 베드로는 가룟유다와 크게 다르지 않게 배신을 드러냈습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든, 예수님을 보호하려 했든,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든 어리석었고, 어설펐고, 민망했고, 한심했고, 개탄스러웠습니다. 제자들은 우리로 하여금 ‘저래 가지고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위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죽이려 했던 자들은 ‘저런 말도 안 되는 자기모순과 논리로 예수를 죽이려 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말 그대로 인간의 사악한 죄 속에서 예수님이 죽으셨지만, 인간의 죄가 예수님을 죽였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위해 적극적으로 매 순간, 단계마다 주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끌려가는 양처럼 수동적으로 잡히셔서 죽임 당하셨을 뿐 아니라 죄인들에게 자신을 적극적으로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죽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주셔야 했기 때문에 겟세마네에서 그런 고통스런 기도가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 두 번째는 죄인인 인간이 자기 죄를 스스로 덮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이뤄지는 과정, 십자가로 가는 과정에서 본문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역할들을 담당하고 있었는데도 본인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모순과 부패가 드러났지만 그것을 자기들 힘으로 가리기 위해 예수를 죽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계획이 어긋나 예수님이 나약하게 끌려가고, 사형이 결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예고한 죽음을 유다는 막을 수 없었고,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에 사용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나름 예수님을 위하려다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스스로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참하게 끝이 났습니다.
베드로 역시 유다와 인간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철저히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성령은 닭이 우는 순간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없었고, 오히려 주님과의 관계를 저주하며 부인한 죄인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그렇게 될 것에 대해 예수님이 미리 말씀해 주실 때 강력하게 부인했는데도 비켜가지 못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울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를 그대로 들고 살아나신 주님을 만났고, 주님만이 죄인인 자신을 용서하시고 해결하실 수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 아는 그 부끄러운 이야기를 다른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본문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무엇이 죄인 줄 알아도 피하지 못하는, 저지르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처리할 수 없고, 덮을 수 없고, 개선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님으로만 우리의 죄가 해결되고, 우리의 부끄러움과 무거움과 슬픔을 씻을 수 있습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의 중심 십자가 (마 27:27-66) (0) | 2018.07.22 |
---|---|
빌라도의 재판을 받으시다 (마 27:11-26) (0) | 2018.07.15 |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주님 (마 26:31-46) (0) | 2018.07.01 |
성찬의 의미 (마 26:17-30) (0) | 2018.06.24 |
여인의 헌신, 유다의 헌신 (마 26:1-16) (0) | 2018.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