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1-1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유대 지도자들이 대제사장 가야바를 중심으로 모여 예수를 언제 죽일지 논의했습니다. 그들이 예수 죽일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를 붙잡아야 하는데, 그 일을 도와 줄 자는 바로 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고 은 삼십 개를 받습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이미 알고 계셨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종교지도자들과 제자 유다의 결탁 사이에 향유를 부은 여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제자들과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때 한 여자가 들어와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그저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한 감격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어, 자기 소유의 전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자신의 장례를 위해서 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부은 옥합 한 개 분량의 향유는 돈으로 따지면 삼백 데나리온, 즉 당시 노동자의 일 년치 품삯에 해당되는 가치였습니다. 그렇게 비싼 것을 사람의 몸에 전부 부었다는 것은 사실 낭비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화를 냈습니다. 제자 중 하나는 ‘무슨 정신으로 이 비싼 것을 낭비하냐고, 차라리 그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 말을 한 자는 요한복음에 따르면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요12장).
유다가 향유의 가치를 아까워하면서 비난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늘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냥 화가 나고 비난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를 표현한 것이 이제 곧 예수를 배반할 자신과 대비되기 때문에 양심이 찔려 화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 특히 유다는 평소에 예수님께서 굶주리고 병든 자들을 안타깝게 여기셨을 때는 공감하지 못하다가 이제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 집중해야 할 때는 가난한 자들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지금 뭐가 중요한지, 예수님의 관심과 의도를 모르니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실 때는 제자들은 돈이 없다고 말하고,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해야 할 때는 가난한 자들을 들먹이면서 딴 소리를 한 것입니다. 특별히 유다가 그랬습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형편을 바꾸고, 멋진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는 계산적이고, 매우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향유의 가치인 삼 백 데나리온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는 또 종교 지도자들과 쉽게 결탁할 수 있었던 것만큼 상황과 사람들을 이용하는 정치적 자질도 있었습니다. 그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정치적으로 성공시킬 수 있는 킹 메이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그런 지도자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위대한 하나님 나라가 아닌 낮아짐과 섬김을 말하고, 십자가 죽음으로 성취되는 나라를 말하니까 유다는 다른 제자들처럼 실망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가 초월적 능력을 사용해야지 죽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가 온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돕고 자신도 뜻을 이루려 한 것입니다. 예수처럼 해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고 자기 생각대로 해야 된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넘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 세상을 바꾸시는 것은 사람의 생각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세상에 더 확장되고, 교회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만한 방법을 가지고 시도해 왔지만 그런 노력이 있던 시기마다 교회는 세속화 되었고, 더 타락했습니다. 오히려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계획하고 추구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핍박과 고난과 죽음으로 확장되어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그 시작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가룟 유다는 그런 것에 전혀 눈 뜨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나머지 제자들이 수동적이었다면, 가룟 유다는 적극적으로 자기 길을 간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예수 따랐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그는 아무런 보상 없이, 성취 없이 끝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예수님을 죽게 하는 일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을 바꾸시는 방법은 달랐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보기에 쓸 데 없이 낭비를 한 이 여인이 복음과 함께 온 세상에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훌륭한 지도자가 되시는데 자기가 생각하는 방법이 최선이고, 예수님과 함께 자신이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를 바랐을 것인데, 오히려 이 여인이 복음과 함께 예수님과 함께 기억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대단한 헌신을 해도 그 가치에 무엇을 더 첨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헌신이 인정받고 영향력이 있을수록 내 안에 죄가 꿈틀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 죄와의 싸움을 잘 감당해 내지 못한다면 그 탁월한 헌신이 나중에 우리 자신을 넘어뜨릴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헌신한다고 할 때 주님처럼 죽는 것을 생각해야지, 위대한 헌신을 하겠다는 포부를 갖는다면 가룟 유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죄와 싸우는 거듭난 성도라면 헌신의 의미와 가치, 성취의 여부는 내가 느끼는 것도,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닌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나의 헌신이 낭비처럼 여겨져도 실족하지 않고, 큰 효과가 있어도 교만하지 않기 위한 싸움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의 헌신이 쓸모없게 여겨지더라도 그저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용해주시는 것에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헌신은 무엇입니까? 이 여자처럼 주님의 사랑에 압도되어서 자신의 귀한 것이 그냥 낭비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체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 자체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이 사람들에게 쓸모없게 여겨지는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평가 받는 것, 나의 헌신이 얼마나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되게 할 것인지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그런 헌신을 하셨습니다. 헌신의 가치, 의미를 오직 하나님이 부여하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제자 중 그 누구도 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그 여인의 헌신에 귀한 의미를 부여하신 주님이 우리의 헌신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다른 무엇을 이루거나 얻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유다처럼 예수를 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헌신하신 것처럼, 부활 후 사도들이 그런 헌신을 한 것처럼 헌신하는 자는 자기 행위와 포부를 가지고 공로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그 헌신이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고, 은혜를 더욱 구하게 되는 경험을 할 것입니다. 그는 여인이 부은 향유보다 더 귀한 독생자의 피를 나 같은 자에게 쏟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깊이 경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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