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17-30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완전히 알고 계셨고,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루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도 끝까지 제자들과 또 자신을 믿게 될 우리들의 유익을 위해 행하셨습니다.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 잡히실 때를 몇 시간 남겨둔 저녁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하신 행동과 말씀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고, 다음으로 떡과 잔을 나누신 것이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배반할 자가 그 자리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중에서 마태는 주님이 제자들 중에 배반할 자가 있다고 언급하신 것과 떡과 잔을 나누어 주신 것 이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당황하며 ‘저는 아니지요.’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가룟 유다 역시 ‘저는 아니지요?’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께 물으니 자신만 가만있으면 탄로날까봐 뻔뻔하게 질문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기기로 약속한 것이 예수님을 판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는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알고 계시다는 사실로 인해 두려워하고 회개를 하기보다, 다른 제자들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태연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이 주시는 떡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떡은 자신의 살이고, 잔은 자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카톨릭에서 말하듯 이 떡과 포도즙을 먹는 순간 성도의 몸속에서 진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 예식 자체나 떡과 포도즙 자체가 신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것이 신비한 것입니다. 성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법이기는 하나 성찬에 사용되는 물질들과 그것을 먹는 우리의 육신이 신비로운 경험을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찬을 받을 때 우리가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 때문에 사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그것으로 참회하게 되고, 더욱 의지적인 결단을 하게 하기 때문에 신비한 것입니다. 그런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이 시간에는 성찬이 갖는 과거, 현재, 미래 속에서 주는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성찬은 과거와 연결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 전 하나님께서 열 번째 재앙으로써 각 가정에 장자의 죽음을 내리실 때에 자기 백성들은 피할 길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때에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틀에 바르고 고기를 먹으면 하나님께서 넘어가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중요 절기인 유월절입니다. 성찬의 의미에 그 유월절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하신 그 시간은 유월절 전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저녁에 먹기 위한 양을 잡아서 준비해야 했던 그 낮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죽으신 것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어린양이심을 확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처럼 우리의 소속이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고, 죽임 당할 자가 심판을 비켜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입니다. 그렇게 성찬은 유월절이라는 이스라엘의 과거를 통해 예수님의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두 번째로 성찬은 성도의 삶에 중요한 현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19절에서 예수님은 성찬을 통해 자신을 기념하라고,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성도들은 성찬을 지킵니다. 성찬의 떡과 잔은 사람의 몸의 생존이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예수님이 참된 양식이 되시고, 음료가 되신다는 의미를 담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살려면 다른 생명체가 죽어야 하는 것처럼 성찬의 떡은 우리 영적 생명이 우리를 위해 희생된 예수님께 의존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 그 떡이 쪼개지고 나눠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찔리고 찢긴 몸,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게 하고, 그 몸을 나눈 자들의 공동체성을 묵상하게도 합니다. 이렇게 성도가 현재 누리는 생명은 예수님께 지금 현재 의존되어 있습니다. 떡은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피에 있습니다. 죄사함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8절에서 예수님은 ‘죄사함을 위한 나의 피,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은 성도가 예수님의 죄사함의 능력을 현재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확인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단번의 제사로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지만 우리는 죄를 지속적으로 다루면서 그것을 해결하신 주님을 생각하고, 자유함을 얻고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성찬을 헛되이 받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여러 가지 적극적이고 풍성한 의미를 누릴 수 있는 듯해도 죄사함에 대한 분명한 반성과 회개 없이, 자신의 죄를 돌아보지 않는 성찬을 통해 성도는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고전11:29). 본문에서 가룟 유다가 그런 것입니다. 성도는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자신의 죄를 해결하는 것을 현재적으로, 지속해서 기억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성찬에는 미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2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 완성될 천국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찬의 모든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근거로 합니다. 그러나 그 과거의 죽음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고, 마지막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에 동참하는 자들만이 그 모든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찬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희생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지만 단지 과거에 일어난 그 십자가 사건에 대한 기억만으로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은 마지막에 새 포도주를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영광스런 잔치 자리에 앉혀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주님을 우리가 기다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눈으로 보고 입으로 먹는 떡과 잔은 주님을 몸소 뵙기를 더욱 소망하게 하는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성찬을 행할 때 이해하고 떠올려야 할 뿐 아니라 가능하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영원한 죽음과 심판을 면케 하신 어린양이시고, 우리의 참된 양식이 되시며, 자신의 피로 우리 죄를 씻으시는 분이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에게 새 포도주로 잔치를 베푸실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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