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복음의 중심 십자가 (마 27:27-66)

따뜻한 진리 2018. 7. 22. 23:39

마태복음 27:27-6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도록 넘겨주자, 예수님은 살점이 뜯기는 채찍에 맞으셨고, 여러 가지 모욕적인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이고, 중심입니다. 그뿐 아니라 십자가는 세상의 역사, 시간에 있어서도 중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의 역사나, 십자가 이후의 시간은 모두 십자가라는 중심을 향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영혼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에 따라 최종적으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고 여김 받는 근거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만족하시도록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을 뿐 아니라 무지하고 악한 죄인들이 자신을 죽이도록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사탄을 이기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 대신 죄 값을 당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근거로 선택한 자들을 의롭다고 여기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또한 악한 자들의 죄를 드러내시고 지옥에 보낼 근거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저 십자가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었고, 자발적으로 십자가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 자신의 일임을, 이 땅에 온 이유임을 알고 계셨고, 죽음으로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성취였습니다. 그러나 세상 여러 종교들 중 성경을 사용하거나 기독교적으로 보이는 이단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을 실패로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 중의 하나이고 실패한 자로 여깁니다. 유대교가 그것이고, 이슬람이 그렇고, 통일교 같은 여러 사이비 종교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실패하신 것이 아니라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이해하지 못할 방법으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런 종교들 뿐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예수님의 죽음은 무시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말로는 강조하고, 보혈을 노래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진지하게 지속적으로 다루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신자의 본분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와 성도들은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기는 하지만 부활을 기뻐하기 위해 지나가는 과정 정도로 여깁니다. 그렇게 설교합니다. 부활절의 고난주간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수년전부터 유명세를 타면서 한국교회를 혼란하게 하고 있는 어떤 교회 목사는 부활복음이라는 것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십자가 복음으로는 능력이 안 나타났지만, 부활의 능력을 믿고 의지 했을 때 능력들을 체험했다고 말하면서 십자가 복음이 아니라 부활 복음을 믿고 체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그럴싸하기 때문에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속임수입니다. 신비 체험, 긍정의 힘, 적극적 믿음을 지지하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과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옳다는 것을 하나님이 확증하신 것입니다. 다시 살리셔서 증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애동안 가르치신 내용, 즉 죄인들을 위해 자신이 십자가 죽음을 감당하셔야 하는 것과 자기를 믿는 자들도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죽기까지 순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사실임, 옳다는 것을 하나님이 증명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것을 알고 성도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인내하는 것이 부활신앙이지 십자가를 축소시킨 부활을 신비한 능력의 원천으로 삼는 것은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그렇게 부활십자가 죽음을 확인시키고 강조하는 것이지 부활 자체로 탁월한 의미와 능력을 주지 않습니다. 부활은 천국에 가는 자나 지옥에 가는 자나 모두 체험할 일입니다. 부활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헛것입니다. 그런 헛된 것을 좇는 이유는 자신의 죄를 진지하게 다루려 하지 않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십자가가 여겨졌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상 안목으로 판단한다면 성경과 기독교의 모든 것을 안다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생애 중 십자가로 가시던 고난 주간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 했습니다. 마태 역시 그러해서 마지막 28장 한 장에서만 부활을 다루는 것과 달리 많은 분량을 통해 우리를 십자가에 집중시켰습니다.

 

    사도들은 부활을 강조하긴 했지만 십자가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으로 정의했고, 베드로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1:18-19)’,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벧전2:24)’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속죄를 위해 이 땅에 성육신하신 것을 강조하고, 계시록에서도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십자가가 중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성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님을 영원토록 찬양할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 십자가로 인해 우리에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지속적으로 신앙의 중심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 거짓 복음에 속는 이유는 예수 믿는다는 자들이 회개와 고난과 순종을 자신의 본분으로 인정하기보다 승리, 쟁취, 자기 확신과 체험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신속히 버리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부활이 신비한 능력의 원천으로 이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그 자체로 신비한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복이 아닙니다. 참된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셨으면 부활이 없었을 것처럼,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자기 죄에 대해 죽지 않고, 자기를 계속 부인하지 않는다면, 죽다가 살아나는 위대한 체험을 해도 부활은 헛된 것입니다. 그런 자의 부활은 지옥을 위한 부활입니다. 부활한 예수를 붙잡고 의지하는 것이 십자가의 무거운 짐을 더 이상 지지 않게 한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을 생각하도록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전히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라고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끝까지 붙잡지 않고, 십자가를 자신을 억누르는 짐으로 인식한다면 그 사람은 구원 얻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십자가에 아들을 못 박으셔야만 했던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고, 자기 본성에 맞는 좋은 결과만을 취하려고 하는 이기심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지 못할 때 우리는 다른 것에서 기독교의 능력을 추구하려 할 것이고, 그것은 파멸을 가져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싫어하는 것을 우리가 자랑하도록, 세상이 죽음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생명을 얻도록 십자가에 복음을 담으셨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계속 싫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거듭난 자는 십자가를 사랑할 것입니다.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바른 길을 걸었던 성도들처럼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십자가를 전하는 영광을 누립시다. 그 십자가를 끝까지 붙들면서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