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자발적 산 제물 (롬 12:1-21)

따뜻한 진리 2019. 6. 30. 20:37

로마서 12:1-2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바울은 죄인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 얻는 것을 말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자기를 우월하고 특별하게 여기며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죄인을 조건 없이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지혜를 영광스럽게 찬양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런 내용을 1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말에 함축해서 그런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자비를 입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자기가 받은 그 사랑을 몸으로, 구체적인 실제 섬김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실제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가르침으로, 깨달음으로 구원시키신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삶과 몸의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구체적인 섬김과 헌신으로 반응해야 하는 이유는 구원이 죄를 씻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삶을 드리는 것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죄를 씻은 것,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믿는다는 것은 자유함, 감격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죄의 근본적인 속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드리는 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자라면 그는 반드시 주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실 뿐 아니라 그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하는지도 보이셨습니다. 행하셨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단지 죄의 해결, 죄의 처리를 말할 뿐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도록 만들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살아있는 제물로써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살게 하는 능력이 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셨 듯 우리도 주님을 위해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1절에 등장하는 영적이라는 말은 육체와 반대되는 어떤 정신적이고 신비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이라고 번역된 것은 적절한 번역이 아닙니다. 바울이 사용한 원래 단어의 뜻은 당연한, 합리적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구원받은 우리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합당한, 당연한 것입니다. 자기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삶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예배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자기 삶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이 세대의 영향을 받아 이기적으로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신성시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굴복하고 구원을 얻도록 종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성도는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상대가 어떻게 하는지 눈치 보면서 나도 그 만큼만 하거나 그보다 더 인정받을 만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대로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나 보이고, 다른 사람이 나보다 어떤 일을 잘 한다고 해서 위축되지 않고, 반대로 내가 남보다 뭘 잘 하고 잘난 것 같아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공로를 바라지 않고, 또 뭔가 인정받을수록 마음 속에 밀려들어오는 공로적 만족을 버리면서 헌신적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은 나의 헌신과 비교할 수 없이 크신 주님의 헌신과 희생을 아는 것, 묵상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건전한 헌신적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재발견할 때 가능해집니다. 바울은 그것을 3절에서 믿음의 분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같은 교회 안에 있어도 믿음의 분량이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상대방과 공동체의 필요를 볼 줄 아는 능력과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능력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것은 인격적 성숙과 경험과 지혜와 민감한 지각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은혜에 빚진 심정이 그 사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바울이 믿음의 분량대로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가 구원받을 때 헌신과 섬김의 자질과 능력이 기계적으로 누구나 동일하게 생기는 것이 아니고 사람마다 다르게, 전인격적인 성숙과 변화 속에서 얻게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구원 얻는 믿음이라는 것이 공로가 될 수 없듯 남보다 나에게 탁월한 섬김과 헌신의 능력이 있어도, 그것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도 교만할 수 없기에 믿음의 분량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무것도 아닌데 그걸 보시고 구원해주시듯, 우리의 은사와 섬김도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쓸모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분량이 많은 자는 분량이 적은 자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더 많은 섬길 거리를 만드는 지체들, 손이 많이 가고 정신적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게 하는 사람들, 때로는 이기적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 있더라도 먼저 된 자, 믿음의 분량이 많은 자는 믿음의 분량이 적은 자들을 판단하기보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깨닫고 변화되어 헌신적인 삶을 살도록 기도하고, 복음으로 권면하는 마땅한 일입니다.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말입니다.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내 눈에는 어떤 문제와 필요가 빤히 보이는데 개선이 안 된다고 해서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자기가 하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그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공동체에 대해 남이 못 보는 허점들이 보인다면, 그것으로 내가 답답해진다면 그 빈틈을 메우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위로하고, 돕고, 가르치고, 구제하고, 섬길 때 하나님께서 상대의 구원을 위해 내가 섬길 기회를 주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랑과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 나의 그 섬김으로 가족과 성도가 비록 하루아침에 바뀌고 성숙하지 않을지라도 소망 중에서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서 참으며 상대방의 구원과 변화를 위해 기도에 힘쓰면서 섬겨야 합니다. 섬김의 효과가 드러나지 않고, 아무도 몰라준다 해서 게을러져서는 안 되고 주님을 섬긴다는 자세로 부지런히 감당해야 합니다. 또 그런 섬김 속에서 오해와 박해를 당할 때 낙심하지 말고 고통을 주는 자를 저주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몰라주는 상대, 오해하고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섬김과 헌신이 형식적으로 지속되기 쉽습니다. 그럴 때 나의 헌신이 진실한 것인지는 그들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고 그들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것으로 점검되어질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에 대한 나의 미움이나 교만함이나 부당하게 여기는 마음이나 체념이 있다면 함께 울고, 웃는 일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모두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누군가 먼저 구원받았다고, 먼저 기회를 얻었다고, 심오한 것을 먼저 깨달았다고, 특별한 장점과 은사를 주셨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먼저 받았으면, 남들이 알지 못하는 사랑을 받았으면 더 먼저, 더 많이 헌신하고 섬기고 그로인해 고난을 겪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자랑하고 교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겸손한 자세가 수고하고 섬기는 실천에서 그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먼저 은혜를 받았을수록, 많은 은혜를 깨달았을수록 아직 연약한 자들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중 가장 먼저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장 큰 고난을 당하셨 듯 먼저 구원받고, 먼저 깨달은 자는 그런 헌신적 예배의 삶으로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