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1:1-1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전도서는 잠언, 욥기, 아가와 함께 구약의 지혜서 중 하나입니다. 1장 1절에서 밝히는 대로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썼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 그리고 다윗에 이어 세 번째 왕입니다. 솔로몬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솔로몬에게 무엇이든지 구할 기회를 주셨을 때 솔로몬은 왕의 직무를 잘 감당할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지혜를 솔로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대신 전도자라고 소개합니다. 전도자는 히브리어로 코헬렛입니다. 코헬렛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르치는 자를 말합니다. 열왕기상 10장에 등장하는 스바의 여왕도 지혜를 얻기 위해 솔로몬을 찾아왔듯, 아마도 솔로몬은 외국의 높은 사람들이나 이스라엘의 공직자들 앞에서 가르쳤던 것을 배경으로 해서 자신을 전도자라고 소개하면서 글을 쓴 것 같습니다.
전도자는 2절 그 시작부터 강한 결정타를 날립니다. 2절은 전도서 전체를 통해 전도자가 말하고자 하는 인생에 대한 통찰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읽은 개역한글성경에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영어성경에서 허영, 헛됨을 뜻하는 vanity 또는 의미 없다는 뜻의 meaningless, 한글성경에서 헛됨이라는 단어는 전도자의 의도를 오해하게 해서 전도서 전체를 잘못 이해하거나 전도자가 뒤에 가서는 앞의 이야기와 모순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위험이 높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헛됨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래 단어는 헤벨인데, 헤벨은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헤벨은 창세기에서 첫 죽음을 맞이한, 짧은 생을 산 아벨과 같은 철자이고 의성어입니다. 그러니까 헤벨은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소리를 표현한 단어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반복적으로 내뱉는 숨처럼 세상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3절에서 전도자가 말하는 ‘해 아래’는 인생이 사라지는 시간의 범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해 아래’가 태양 아래의 이 땅이라는 공간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그 공간 역시 시간 아래에 묶여 있습니다. 해는 시간의 기준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해 아래’는 시간에 의해 철저히 제한받는 인간과 피조세계를 말합니다. 시간 속에서 인간의 삶과 업적이 순간처럼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구 환경의 기초인 땅을 인간들이 더 나은 것으로 멋지게 바꾸겠다고 난리를 쳐왔지만 그 문명들은 모두 사라졌고, 땅은 항상 그대로 있습니다. 시간 속에서 인생들은 호흡처럼 순간입니다.
5절부터 말하는 해가 뜨고 지는 것, 바람이 이리저리로 부는 것, 물이 순환하는 현상 역시 인간은 그 흐름을 바꿀 수 없고, 오히려 그 순환 속에서 사라지고, 흔적도 없이 잊혀지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즉 인간의 모든 고생과 수고가 시간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혜로운 줄 알고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만 피곤할 뿐입니다. 자연의 순환적인 힘 뿐 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름대로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들 역시 새로울 것이 없는 항상 반복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뭔가 새롭다고 만들어내는 것은 껍데기와 사용된 기술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이전에 있었던 것들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만든 자나, 그것을 구해서 사용하는 자나 그것이 이전에 없었던 더 복잡하고, 세련되고, 새로운 것이라고 호기심을 가지고 빠져들지만 금새 잊어버리게 되고, 계속 새로운 것에 흥분하지만 정말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아무런 진보가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우리의 인생과 역사가 허무하고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 모양도 없고, 손에 잡히지도 않고, 사라지는 호흡과 같다는 것입니다. 물론 순간적이라는 것이 허무하고 헛됨을 안겨줄 수도 있지만,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이라 해서 아무 의미가 없고 쓸데없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자는 우리에게 허무주의에 빠져서 의욕을 잃거나, 인생의 목적 없이 게으르게 살거나, 모든 것이 허무하니 순간의 쾌락을 위해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순식간이고,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아도 다 잊히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시간과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냘픈 숨, 사라지는 숨, 남는 것이 없는 호흡처럼 아직 나에게 먼 미래 같았던 노년이 어느새 현실이 되어, 곧 끝나버릴 인생 속에서 속히 정신을 차리고 진지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어떤 자극보다 죽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인생들은 그런 진지함을 회피하고 즐거움과 재미로 죽음이 주는 지혜, 진지함에서 달아납니다. 모든 것이 즐거워야만 된다고 요구합니다. 배우는 것도 재미있게, 즐겁게 하는 것이 가르치는 자의 의무라고 요구합니다. 설교를 재미있게 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물론 재미있게 가르치면 좋습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쉽게 가르치고, 흡인력 있게 가르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재미있게 가르치고, 정말 깨달아야 할 내용을 재미, 흥밋거리로 포장해서 주어도 결과적으로 별 효과가 없습니다. 인생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진정 바뀌게 할 지식, 지혜를 전달받는 길은 그것을 온갖 재미있는 것으로 감싸서 전달해주는 부모나 선생을 만나는 것보다 각성, 깨어남, 위기의식을 갖는 것이 더 확실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시대, 상황, 사건을 만나는 것이 가장 확실합니다. 그래서 자기 나라가 힘이 없고 무지해서 앞선 나라에 당하는 시대를 겪거나, 자기 부모가 무지하고 가진 것이 없어서 무시당하는 것을 보거나 하면 그 사람은 정신을 차려서 공부를 하거나 성실하게 무엇을 배웁니다. 재미있게 가르쳐주지 않아도 코피를 쏟으면서 자기 일을 연마합니다. 공부를 합니다. 그런 자극이 없고 태평한 시대를 살기 때문에 공부든 일이든 재미와 쾌락으로 자극해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인생의 짧음, 죽음을 맨 앞에 던져 놓았습니다. 죽음은 그런 차원에서 인생을 진지하게, 성실하게, 지혜롭게 살게 하는 선생입니다. 물론 어리석은 인간은 죽음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죽음을 통해 앞에서 말한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를 갖기보다 오히려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대부분은 그런 길로 갑니다. 성실한 척해도 마음 속에 허무주의적인 인생관을 품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없고, 사라지지 않는 어떤 것들 남길 수도 없지만, 모든 것이 순식간이지만 절망하거나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그런 태도와 삶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거짓에 잘 속게 됩니다. 정말 헛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갇혀 있지만 그것을 의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이 해 아래, 짧은 인생 속에서 성실하게,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자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입니다. 영리 목적으로 설교를 스크랩, 캡처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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