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3:1-2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전도자는 말합니다. 세상 모든 일에 때가 있어서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죽일 때가 있고 병을 고쳐야 할 때가 있고, 소중하게 여겨야 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전도자의 의도는 세상만사가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으니 얽매이지 말고 순간 순간 임기응변에서 적당히 잘 생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 때는 소중하게 여겼다가 어느 순간에는 이전의 가치를 허물어버리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달관하라는, 그런 모순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위로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또 그런 시기나 때를 잘 분별해서 기회를 잡는 것, 타이밍을 노리는 것, 눈치를 잘 보는 것이 인간의 지혜라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 전도자가 말한 양 극단의 행위들이 때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은 도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상반된 일들이 아닙니다. 즉 치료해서 살려야 할 때가 있고, 죽게 나둬야 할 때가 있다는 내용과 전쟁할 때와 화평할 때가 있다 말은 절대윤리란 없고, 상황에 따라 하면 된다는 것, 또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가 있고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어야 할 때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전도자가 말한 것의 의도는 우리가 영원히 일관되고 지속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때를 통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 일이 가장 좋은 일,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몰입하고 기뻐하고 그 일에 열정을 쏟지만 시간이 지나면 앞의 일을 뒤집는 일, 왜 그랬나 싶은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들이 잠깐 쓸모 있는 것, 잠깐 의미 있는 것을 위해 땀 흘리고 수고합니다. 백년 만년 사용할 것처럼 물건을 만들고, 돈을 주고 사지만 금새 식상해서 버리고 새것을 찾습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사랑도 변합니다. 엄청난 비용과 의료기술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살리려고 하지만 전쟁이 나면 열심히 죽입니다. 인간이 하는 짓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 모순되고, 상반된 일들을 반복하는 가운데 인간은 자신이 잘 하고 있다고, 열심히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9절에서 전도자는 그렇게 살아서 남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말합니다. 전도자는 앞의 1장 13절에서도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라고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수고하고 고생하도록, 시간 지나면 허무함을 느낄 것들을 하면서 살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삶, 고생하지만 허무해지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까?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영원한 가치를 바라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들에 허무함을, 괴로움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주셔서 어떤 것으로도 그것이 채워지지 않고, 단지 잠깐, 순간적인 만족만 얻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순간적인 기쁨들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적인 것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나아가 하나님께만 영원한 만족, 기쁨이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매 순간과 영원토록 하나님께 의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감사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께 의존해서 영원한 만족을 누리는 것으로부터 끊어졌을 뿐 아니라 순간적인 만족마저도 고통과 모순이 있게 된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순간적인 기쁨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순간들은 쾌락을 추구하는 단위들이 되었고, 사라지고 허망한 것에 열심을 내야하는 인간 한계는 서로를 이용하고 이익을 남기기 위한 기회주의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이 타락한 세상은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용하려고 달려듭니다. 살려주겠다고 할 때도 돈을 벌고, 죽일 때도 돈을 법니다. 세울 때도 돈을 달라고 하고 무너뜨릴 때도 돈을 달라고 합니다. 돈을 위해서 평화를 추구하고, 돈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사랑 할 때도 돈을 쓰게 하고, 헤어질 때도 돈 쓰게 합니다. 이 악한 세상은 앞의 한 일이 결국 소용없게 될 순간을 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비록 타락했지만 순간적인 행복과 고통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굴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계속 저항하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남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16절에서 전도자는 불의와 악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하는 짓, 결국 맞이하게 되는 죽음이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합니다. 죄인인 인간은 짐승처럼 특별한 것을 남길 수도 없고, 자기 삶에서 대단한 가치를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17절에서 말하는 대로 심판입니다. 전도자는 마지막 22절에서 말하는 대로 인간은 인생 속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즐기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후에 일어날 심판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이 심판을 모르거나 부인하기 때문에 그들의 낙은 단지 살아있는 동안일 뿐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도 심판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의 한계 속에서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며 감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무너뜨려야 할 것을 알아도 열심히 쌓아야 합니다. 언젠가 죽을 인생이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을 건강하게 돌봐야 합니다. 죄인인 인간들이 결국 다투고 전쟁을 일으킬 것이 예상되어도 계속 화해시키고 평화를 추구해야 하고, 뻔히 등지고 떠날 것이 예상되는 사람이어도 지금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 헛수고처럼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피조물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고, 앞서 노력한 것을 뒤집는 난감하고 당황스런 순간을 계속 만날지라도 우리는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무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음으로 인생을 끝내게 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순간 순간 충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때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하고, 감사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순간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때들을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셔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선한 자들에게 당황스러운 순간과 고통을 주는 때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는 때가 될 수도 있고, 악인들을 내버려두시는 때가 결국 그들의 심판을 위한 때일 수도 있습니다. 과학기술을 통해 날씨를 예측해서 언제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해야 하는지를 때를 정할 수 있게 되어도, 자율주행을 하는 차가 스스로 속도를 높이고 멈춰야 할 때를 정확하게 통제한다 해도 죽음 아래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의 때는 사람 손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들의 적절한 때도 통제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을 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생이 정말 헛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순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을 조합하셔서, 연결하셔서 인간이 이룰 수 없는, 남길 수 없는 크고 위대한 의미, 가치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젠가 뽑아버릴 것을 심어야 하고, 사라질 것들을 정성스럽게 돌봐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성실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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