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전도서 (5) (전 5:1-6:9)

따뜻한 진리 2019. 9. 8. 09:38

전도서 5:1-6: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앞의 본문에서 전도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짧은 인생에 있어서 그나마 오래가는 것, 이리저리 뒤집히는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위로를 받고 의지가 되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을 억압에서 자유케 하고 하나님의 선물로 그들을 복되게 하는 삶을 살지라도 사람들의 반응에 연연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짧은 인생 속에서 그런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다가 갈 수 있으려면 먼저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만 합니다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힘써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유익한 존재이고, 도움을 주는 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만 싶어 하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인간을 어떻게 여기시고, 인간이 처한 현실에게 대해 어떤 계획과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지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그런 신앙의 행태들을 지적합니다. 1절을 보면 성전 안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보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뭔가를 얻고 싶은 생각에 들떠 겸손한 태도 없이 달려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어설프게 경험한 활력 있어 보이는 신자들의 종교적 열정을 본 받아 잘못된 적극성과 열심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2절에서 전도자는 그들의 주된 특징을 말이 많고, 헛된 세상 일로 근심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런 자들은 확신을 가지면 복 받을 것이라는 욕심에 근거한 믿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헛된 비전을 남발하면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겠다고 어리석은 서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거나,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포장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그것에 대해 꿈이 많고 말이 많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과장된 행위, 선동된 행위들은 하나님을 진정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전도자는 가난한 자들이 학대받는 것,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에 놀라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이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되었는지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설명을 듣지 않는 자들은 세상의 비극에 대해 지나치게 놀라고, 자기 울분과 개혁 의지에 타올라 결국 하나님 없는 해결책을 내놓지만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더 고통으로 내 몰뿐입니다. 부처가 그렇습니다. 칼 마르크스가 그랬습니다. 세상의 문제와 원인을 자기가 깨달은 줄, 해답을 찾은 줄 알지만 부처의 대답대로 해탈한다고 열심을 내봤자 지옥 밖에 없습니다. 칼 마르크스가 모든 인간이 계급에서 해방되고 평등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공산주의를 고안해 냈지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내몰았고 현재도 고통 가운데 가둬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채, 타락과 죄의 비참에 대해 깨닫지 못한 채, 인간의 죄가 누구에 의해서 해결될 것인지도 모르면서 세상의 문제를 파악한 척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높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비참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은 결국 대단한 개혁의지를 품지만 허황된 해결책으로 열심을 낼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자의 뜻은 세상 죄들에 방관하고, 적당히 적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죄로 인한 문제들이 우리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지만 죄를 미워하고, 막을 수 있는 것들은 막아야 하고, 피해를 입어 억압당하는 자들을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의존해야 합니다. 죄인들의 세상 문제에 대해 당연히 예상하고, 묵묵히 섬기지만 사람에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음을 인정하면서 겸손히 완전한 심판과 완전한 회복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헛된 꿈에 사로 잡혀서 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더 큰 고난에 빠뜨리지 말고 차라리 너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 문제가 무엇입니까? 510절부터 말하는 욕심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욕심이 헛된 고난을 가중시킵니다. 많이 가지면 행복할 줄 알지만 많이 가진 만큼 고민도 걱정도 늘어납니다. 전도자는 차라리 열심히 수고해서 번 것으로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복되다고 말합니다. 헛된 욕심에 사로 잡혀서 고생할 바에야 태어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덜 고생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에 지나치게 분노하여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오래 살 것까지 생각해서 그 때까지 풍요롭게 살려면 얼마가 있어야 하는지를 계산하면서 근심하지만, 전도자는 그렇게 멀리까지 고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대로 인생의 선물을 받아 즐기는 자가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고 20절에서 말합니다.

 

    전도자가 지적하는 대로 우리가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버티고자 이기적인 쾌락주의에 탐닉하거나 어리석은 이상주의에 환상을 갖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설명을 듣고, 하나님이 주시는 답과 해결책을 신뢰하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써 고난을 감수하면서 시시 때때로 공급해주시는 깊은 위로와 작은 기쁨들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생활, 교회 활동과 예배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이 세상의 문제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해결책과 장래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의 부조리에 편승해서 세상 사람들처럼 생존하거나 불의를 바꿔보겠다는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안다고 여기면서 그런 생존 방식과 허황된 유토피아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할 것입니다. 결국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인생과 역사를 진정 헛되게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뭔가를 이루는 종교가 아닙니다. 신의 능력과 도움을 받아서 성취를 이루는 종교가 아닙니다. 전도자가 폭로하는 대로 타락한 인간은 어떤 삶을 살든지 참된 의미를 얻을 수 없기에 끝까지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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