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전도서 (6) (전 6:10-7:29)

따뜻한 진리 2019. 9. 15. 09:51

전도서 6:10-7:2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전도자는 궁극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참된 지혜를 얻기를 바라지만 모든 사람이 거기까지 도달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누구나 어느 정도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실제적인 교훈들을 주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장례식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웃고 떠드는 잔칫집보다 사람이 죽어 침울하고 무거운 장례식장이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전도자는 늘 초상집 분위기처럼 우울하게 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 속 인생과 호흡이 과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죽음을 가까이 하고, 머지않아 사람들이 나의 사진 앞에 찾아올 때를 생각하면서 살면 그나마 어리석은 삶을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좋은 기름보다 좋은 이름이 낫다고 말합니다. 즉 죽은 몸을 치장하기 위한 향수보다 죽은 나의 이름을 사람들이 들을 때 어떤 느낌을 갖게 될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때 즉 출생, 결혼이 인생의 찬란한 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죽음이야 말로 고된 생의 위로와 격려를 받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생일을 중요하게 매년 챙겨주지만, 상대를 더 참아주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비결은 언젠가 떠난다는 것을 생각할 때입니다. 상대 뿐 아니라 나 역시 계속 곁에 있어 줄 수 없기에 현재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가 허무하게 가는 불쌍한 인생임을 생각할 때 안타깝게 여기고 더 잘해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도는 죽음을 기점으로 있게 될 최종 심판을 생각하면서 지금 현재 경건한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죄를 완전히 청산하고,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고 영광스러워질 순간입니다. 죽음이 출생보다 나은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해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통해 우리는 끝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면서 헛된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앞에서 말한 대로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관계들을 삶의 중심에 두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얻지 못하는 인생은 죽음 아래서 정말 헛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정직하게 고민하기를 회피합니다. 전도자는 그런 자들의 삶이 어떤지를 말합니다. 4절부터 보면 죽음을 회피하는 자들은 흥미와 성취욕에 사로잡혀 삽니다. 또 7장 26절부터 전도자가 말하듯 유혹하는 여자에게 걸려든 것처럼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면 결국 후회할 것들에 자신을 넘겨주는 삶을 삽니다. 또 기대에 부풀어서 어떤 일을 시작하고 일을 벌이는 것, 꼭 해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가 현재를 버티게 하는 낙이 될 뿐, 그런 일의 끝에 무엇이 남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가올 죽음에서 지혜를 얻지 못하면 그저 많은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니 내게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리석음을 좇아갑니다. 다들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라는 말을 멋지게 여기지만 실제로 죽은 자를 통해 교훈을 얻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인간은 탐욕의 지배를 받아 헛된 것에 욕심을 부리면서 인생을 낭비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리 오래 갈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는 일이 대단한 줄 알고 흥분할 것이고,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분노할 것입니다. 물론 분노가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할 때 지금의 분노가 의미가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본다면 상당수의 분노들이 어리석은 표출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 깨달음이 없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고 사는 자들, 어리석은 자들, 성취와 자랑에 미친 자들은 어느 순간 인생의 허무함에 빠지게 될 것이고, 더 이상 자신의 젊음과 가능성과 자유분방함으로 인생의 헛된 의미를 채울 수 없는 때가 오면 과거에 대한 향수로 현재를 이겨낼 것입니다. 그들은 ‘옛날이 좋았다’라고 ‘왕년에’, ‘나 젊었을 때는’ 이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물론 과거가 지금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그 때가 행복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은 간사해서 과거가 그리 행복하지 않았는데, 행복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애적인 향수는 현재, 지금의 허무를 통해 손짓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끝까지 외면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악화되고 고통을 겪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통제, 허락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로써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선하심이 베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지혜로 항상 지금 우리를 다루시고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주권, 죽음으로 우리를 다루시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현재는 끊임없는 도피의 순간이 됩니다. 그런 도피를 위해 옛 향수에 젖어 있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옛 추억이 우리를 미소 짓게 할 수도 있겠지만 진정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심금을 울리는 것은 장래의 하나님 나라이어야 합니다.

 

    전도자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일 중 하나인 악한 자가 잘 살고, 의로운 자가 고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나쁜 사람들이 사악한 짓을 해도 들키지 않고, 처벌 받지 않고, 잘 되는 일이 있다 해서 우리도 악인들처럼 돈을 벌고, 기회를 노리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세상의 모든 악을 바로 잡겠다고, 지나치게 의인이 되려 하는 것은 자기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렇게 지적을 잘하는 사람은 모두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니 그런 화를 자초하지 말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악을 비판하지 말고 모른 척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만 옳은 줄 착각하고 교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 자신도 때때로 누군가를 비방하고 저주한 적이 있는 똑같은 죄인임을 기억하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18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어리석게 악인을 따라하거나 , 자기 의에 근거한 정의감에 사로잡혀 남들을 괴롭히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지혜를 소유하지 못한 자는 죽을 때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움으로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죽음이 가득합니다. 창세기의 첫 시작부터 사람이 죄로 죽게 된 것을 말하고, 족보들은 죽음을 나열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교훈하실 때 죽음을 생각하도록, 죽음에 직면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죽음을 뜻하는 할례를 요구하셨고, 이삭의 죽음을 요구하셨고, 요셉도 죽음에 처했었고, 출애굽 할 때, 광야 생활 등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죽음 가운데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음의 위협 가운데 나셨고, 죽음을 향해 가셨습니다. 우리도 죽음을 가까이 하면서 삽시다. 전도자가 권면한 삶을 예수님이 사셨습니다, 죽음을 가까이 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악을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흥분하지 않으셨고, 돈과 탐욕에 지배를 받지 않으셨고, 어리석은 일들에 분노하지 않으셨고, 과거의 추억이 아닌 십자가와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뜨겁게 소망하시면서 걸어가셨습니다.

 

    전도자가 죽음으로부터 지혜를 얻으라고 했지만 물론 죽음보다 생명이 낫습니다.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참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은 참된 생명을 얻기 위해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죽음 아래에서 우리의 죄가 다루어져야 하고, 죽음을 통해 죄는 심판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아무리 날뛰어도 허무할 수밖에 없음을, 인간의 이성과 능력이 한계가 있음을, 헛되다는 것을 죽음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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