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12:9-1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전도자가 말한대로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한다고 지혜로운 자가 되어 인생을 행복하고 보람 있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지혜가 죽음 아래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주권을 넘어설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은 어리석어서 제 멋대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가 정리한 지혜는 양들을 바른 길로 모는 막대기처럼 어리석은 죄인들을 찌르고 바른길로 몰아가는 도구로 의도되었습니다. 전도자는 목자이신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사람들의 인생을 복되게 하고자 애썼고,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듯 지혜를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인간의 유한함 안에서 만족하고 순종하는 것이 지혜인데, 그 지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반항하면서 하나님 없이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 진보와 발전과 극복을 통해 영원한 나라를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바벨탑을 쌓고, 질병을 정복하고, 가난을 해결하고, 자연과 우주를 극복하고, 범죄와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지만 비참함을 더할 뿐입니다. 죽음과 종말과 심판을 인정하지 않을 때 인간은 성취와 공로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나 반대로 전도자가 말한 죽음 아래의 유한함을 깨달았다고 해서 게으름에 빠져서 살거나, 어차피 죽을 인생이니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겠다고 하거나, 어차피 사라질 존재들이니 현재의 만족을 위해 상대를 이용해 먹겠다는 기회주의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죽음 아래에서 내가 영원한 것을 남길 수 없고, 나의 선하고 성실한 삶을 악한 자들이 망쳐놓는 일이 있어도 우리는 성실과 선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죽을 자들이라도 보호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받지 못할 자들에게도 사랑을 베푸셨고, 율법에 순종하시고, 선을 추구하셨듯이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인생의 짧음과 부조리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으로써 그 아래에서 우리가 죄의 참혹함과 비참함을 시인하고, 겸손하고, 약해져서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의미 없이 사라지는 인생의 덧없음은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불만을 품거나 냉소적으로 살 이유가 아니라 겸손히 순종할 이유가 됩니다. 그것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이고 구원을 위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역할처럼 말입니다. 유일한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지혜도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인생을 헤매다가 심판대에 설 수밖에 없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하고 성실한 삶은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의 의무이지 우리의 성취감과 공로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의무라는 말은 우리가 아무 감동 없이 기계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인생에는 재미와 기쁨과 보람과 감사와 환희를 주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 속에서 짧은 생명이라도 소중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도 있고, 그것을 극복할 때 얻는 감격과 감동이 있지만 그것들이 참된 의미를 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영화 포레스트 검프 같은 실존주의적 감동이 인생 사는 의미를 주는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죄로 인한 다양한 부조리와 고통이 그 모든 감동을 집어삼키고도 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듯 자기 생의 감동적 순간들을 기억하는 것과 영화와 뮤지컬 같은 예술로 인생을 표현하고 감동들을 끌어내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미화해도 결국은 허탈하다는 것을 인간들 스스로가 보여줍니다.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께 설명을 듣지 않는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코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듯 우리 존재의 의미, 인생의 의미도 우리의 감동과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매우 짧은 삶을 살지만 그것에 감사하면서, 모든 일에 진지하게, 성실하게,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같은 죄인을 죽음 아래 허망한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불만을 품기보다, 징벌이 마땅한 죄인의 인생을 고통으로만 채우지 않으시고, 순간순간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인 줄 알아야 합니다. 전도자의 말대로 음식을 비롯한 삶의 낙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죄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은혜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칭찬 받을 공로로 인정받아야, 눈에 띄는 좋은 결과들이 있어야, 나의 수고한 가치가 오래 남을 만한 대상에만 수고하겠다는 것은 끝까지 자기 공로가 인정되어야, 보상이 있어야 움직이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헛되 보이는 것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이 호흡처럼, 연기처럼 사라질 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공로가 되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수고와 업적이 보존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을 내야합니다. 복음을 믿는 성도들 뿐 아니라, 복음을 거절해서 멸망할 자들도 섬겨야 하고, 하나님 나라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라질 세상 나라에도 봉사해야 합니다. 헛고생하는 것처럼 보여도 순간순간 성실하고 거룩하게 사는 그것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선하게 여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헛되게 사라지고 싶지 않은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사라지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우리는 사용되고 주님이 드러나시도록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선지자들은 자신의 공로로 남을 만한 일에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순종한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출애굽 구원역사를 경험했으면서도 계속 패역한 백성일 것을 전망했습니다. 또 선지자들의 활동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막았습니까? 아닙니다. 백성들의 회개는 늘 일시적이었고, 선지자들은 결국 그들이 망하고 포로로 끌려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 순종한 그들을 주의 종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의 공로가 될 만한 멋진 결과가 남기 때문이 아니라 맡고 싶지 않고, 달아나고 싶은 허망한 일, 듣지 않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공허해 보이는 일에 그들이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종들을 통해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게 하셨습니다.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야고보서 4장은 우리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말하면서도 도덕적으로 성실하게 살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자들은 안개 같은 인생, 순식간에 지나가는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과 성실하심을 드러내면서 살 것입니다. 인생의 수고와 성실함과 거룩한 순종에 대한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고, 시간 속에서 사라진다 해도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으로 인해 성도는 의미를 풍성하게 발견하면서 살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길을 갈 것입니다. 영리 목적으로 설교를 스크랩, 캡처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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