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한계시록 ④ (계 4:1-5:14)

따뜻한 진리 2019. 11. 17. 21:25

요한계시록 4:1-5:1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일곱 교회에 대한 메시지에 이어 새로운 환상이 요한에게 주어졌습니다. 본문 4, 5장은 이후 6장부터 22장까지의 환상들의 기반이 됩니다. 요한이 본 장소는 하늘의 하나님의 궁정,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먼저 3보석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묘사하고 무지개는 노아 때처럼 심판 중에도 자기 백성에게 은혜 베푸실 것을 암시합니다.

 

    4의 이십사 장로들은 천사를 암시하는데 그들은 요한계시록에서 교회를 대표하고, 하늘의 환상을 성도들에게 해석해주고,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전달해드리는 제사장의 직분을 반영합니다. 또한 그 천사들의 활동은 땅의 교회, 성도들이 이 땅에서도 이미 하늘의 도움을 받는 하늘에 소속된 존재들임을 말합니다.

 

    5에서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는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경험한 것인데, 요한계시록 8, 11, 16장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심판들을 마주할 때 출애굽 때 애굽에서 일어났던 열 가지 재앙을 생각하게 해서 애굽같은 하나님의 적대자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다음으로 6에서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를 이해하려면 요한계시록에서 등장하는 바다가 악한 것들이 사는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 때 갈라진 홍해를 이사야 51, 시편 74, 다니엘 7장에서는 용이나 바다 괴물이 사는 거처로 제시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악한 짐승이 바다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 바다가 수정 같은 유리처럼 되었다는 것은 물이 요동하지 않고 잔잔해져서 거울처럼 비치는 상태입니다. 즉 바다에 사는 악한 짐승 마귀가 패배에서 물이 잔잔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이기시고 세상을 잔잔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좌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는 것입니다.

 

    보좌 주변에 있는 앞뒤에 눈이 가득한 네 생물들은 어린양의 수행원으로서 모든 것을 알고, 땅을 살피고, 처벌을 시행하는 존재들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곤경을 정확하게 아시고, 박해자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우리가 신뢰하면서 인내하도록 동기부여하는 것입니다. 네 생물들은 앞의 이십사 장로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 옆에서 수행하는 존재들로서 오늘 본문과 이후 내용에서 계속 등장합니다.

 

    8부터 나오는 찬송,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 대한 경배는 앞의 환상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결정합니다. 세상 악한 왕과 대적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지만 그들은 시간 속에서 결국 죽고 패하고 사라집니다. 오직 하나님만 영원히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그런 심판과 자기 백성을 위하시는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이어지는 5에서도 4장의 배경이 계속됩니다. 보좌에 않으신 하나님의 손에는 심판을 상징하는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 두루마리 책은 인으로 봉해져 있는데, 그 인을 누가 떼어내고 펴볼 수 있겠냐고 한 천사가 외쳤을 때 사도 요한은 이 세상에 합당한 자가 없다고 생각해서 슬퍼했지만 다윗의 후손이자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 같으신 분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는 어린양이신 그분이 그 두루마리의 인을 떼어내기에 합당하신 분이라고 찬양했습니다. 5장은 그 어린양을 향한 찬양인데, 반복되는 내용은 바로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셔서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모든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내용입니다.


    어린양의 손에 들린 그 두루마리 책은 구약성경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미래 종말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한 이야기만을 담은 것도 아닙니다. 그 책은 창세 때부터 아담에게 드러내신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심판계획에 관한 과거, 현재, 미래의 이야기들을 모두 담은 책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그 책의 인봉을 떼시고 펴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그 책이 약속하는 것들을 자신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근거로 심판을 실행하실 수 있는 권리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순간에 어떤 일의 계획서, 계약서, 지침서를 펼쳐서 실행하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펴서 집행하고 계십니다.

 

    그런 주 예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특별히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서의 모습에 집중하고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해 죽으신 이 놀라운 사랑은혜의 증거를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고난을 당한 이 놀라운 신비를 세상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결코 할 수 없는 일, 바로 사망의 죄를 해결하는 일을 이루신 위대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재 생명을 주는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단번에 죽임 당하셔서 승리하셨지만, 그분의 보혈의 능력계속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고, 성도들과 교회의 고난을 계속해서 승리로 바꾸시며, 마지막에 대적자들을 영원한 심판 속으로 던져 넣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 교회는 어린양의 보혈의 능력이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승리, 자신의 생명, 자신의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만 주장하지 않으시고 교회의 승리, 교회의 생명, 교회의 영광으로 여겨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인 우리의 고난과 죽음을 영광스럽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세상 속에서 이 세상 사람들과 세상 풍조와 구별되기 위해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헛된 것들과 자신을 숭배하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오직 참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실 속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요한이 본 이 천상의 예배는 지상 교회의 예배의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 천상 예배 속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면서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예배해야 합니다. 그분이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분명히 아는 가운데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에는 주님의 영광을 놀라워하고, 주님의 십자가 사역의 은혜를 감격스러워하고, 세상과 악인에 대한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완전한 주님의 다스림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야 합니다. 예배는 강의가 아닙니다. 예배는 친목모임이 아닙니다. 예배는 소원을 이루기 위한 출석쿠폰을 받는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과 증거와 은혜들을 주시는 시간이고, 우리는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할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시간으로써 신비로운 만남의 장입니다. 예배는 개인적인 삶을 기초로 하는 자기 고백적인 요소가 물론 있어야 하지만, 자신의 삶이 어떠한지와 상관없이 의무적으로 행하는 요소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한 주가 경건에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와 상관없이, 나의 현재 가정 상태, 나의 감정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가에 관한 사실에 근거해서 진심을 다해 예배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셔야 할 이유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도 그 의무마저 자신에게 귀한 은혜임을 알기 때문에 예배합니다. 그래서 나의 삶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비참한 현실이라도 예배를 받으시는, 높임을 받으셔야 마땅하신, 나를 구원하시고,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나를 괴롭게 하는 모든 악한 것들을 갚아주시고, 완전한 자신의 나라를 허락하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것이고, 그런 하나님을 더욱 알기 위해 예배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내가 소생할 길, 살 길임을 알기에 그는 예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역으로 예배를 통해 그런 하나님을 더욱 알기 원하여서 예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그렇게 이해하고 그렇게 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예배는 그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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