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한계시록 ③ (계 2:1-3:22)

따뜻한 진리 2019. 11. 10. 21:02

요한계시록 2:1-3:22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주님께서는 일곱 교회 중 먼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자신이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113절에 등장했던 예수님의 모습으로써 교회의 상태를 낱낱이 아시는 분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거짓선생들을 구별하는 상당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첫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흔히 이 첫 사랑을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해석하는데, 물론 그 사랑과 연관이 있지만 본문에서 직접 지시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렸다는 뜻, 세상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안타까움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세상을 비추는 촛대, 등잔대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옮기시겠다는 경고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서 말하는 이겨야 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중요시 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 죄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가 유대인들의 비방으로 경제적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을 위로하십니다. 신약시대에 유대교는 로마 당국의 인정을 받아 어느 정도 보호를 받았지만, 그들은 로마인과 이방인들을 부추겨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유대교 공동체를 사탄의 회당이라고 간주한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십 일 동안 시험을 받은 것처럼 서머나 교회가 혹독한 핍박을 당할 것이지만 그런 고난을 신실하게 감당하라고 주님께서 격려하십니다. 그래서 10절의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11절의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이 땅에서 죽음하나님 나라에서 얻는 생명이 되는 이 역설을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강조하려고 처음 8절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소개하실 때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주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죽음과 부활이 되는 신비를 믿어 고난과 죽음을 인내하게 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버가모 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부인하지 않은 것으로 칭찬받지만 예수님은 1장 환상에 등장했던 입의 좌우에서 날선 검이 나오는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서운 심판자로서 버가모에 경고하실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버가모는 소아시아 최초로 황제숭배를 위한 신전을 세운 도시이고, 병원이나 의료단체 로고에 있는 뱀이 의미하는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숭배하는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13절에서 사탄의 권자가 거기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상인조합인 길드에 속해야만 경제활동이 가능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상들을 숭배하는 축제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14절에서 주님께서는 구약에서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참여하도록 애쓴 거짓 선생 발람을 언급하시면서 발람의 교훈에 빠진 자들이 있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우상숭배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시고, 회개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상숭배를 통해 심판을 받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 자신과의 교제를 통해 자신의 승리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그것이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에 새겨진 예수님 자신의 이름을 주신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즉 우상숭배를 이겨내는 성도를, 교회를 예수님께서 자신처럼 여겨주신다는 이 신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 두아디라 교회는 박해 중에도 충성스럽게 복음을 드러낸 것을 칭찬받습니다. 그러나 이세벨로 묘사되는, 여자로 보이는 거짓 선생이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데도 그들이 묵인한 죄를 주님께서 지적하십니다. 앞의 버가모 교회에서처럼 경제활동에서 고립되는 것을 피하려고 우상숭배에 가담하는 일에 대해 타협하는 논리를 그 거짓 선지자가 퍼뜨린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길드의 우상숭배 행사에 참여해도 영적인 해를 입지 않는다는 나름 그럴듯한 논리를 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사탄의 깊은 것이라고, 교묘한 속임수라고 지적하십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회개하고 그런 거짓 선생을 쫓아내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18절에서 주님은 자신을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또 우상숭배의 대상이던 로마 황제들이 자신을 새벽 별, 즉 금성의 후손으로 주장한 것 때문에 진정 빛나는 새벽 별인 그리스도 자신을 교회에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통치자이시고 높임을 받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다섯 번째로 사데 교회2절이 말하는 대로 과거의 온전한 행위 즉,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이 있었지만 잃어버렸습니다. ‘사데라는 단어가 이름이라는 뜻인데, 문자 그대로 그들은 이름, 명성만 있을 뿐 능력은 상실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드러낼 때 받을 핍박을 두려워하면서 영적생명력과 용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능한 교회에 성령과 천사를 의미하는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으로 자기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것은 무기력한 교회를 살리셔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게 만드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충성된 증거자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언하는 자는 심판 때에 그리스도께서도 그 이름을 보증하신다고, 변호하시고 자기처럼 여기실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빌라델비아 교회9절에서 말하는 대로 사탄의 회당으로 묘사된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했고 교인 수가 적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약함 때문에 위축되었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잊으신 것은 아닌가 두려워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을 다윗의 열쇠로 소개하시면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복음을 증언할 기회를 열어두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9절 말씀대로 교회를 핍박하는 유대인들 중에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엎드리고 회개할 자들이 있게 하실 것이니 인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이 있지만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성도와 교회의 이름을 자기 이름처럼 여겨주시는 주님을 소망하면서 믿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째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적으로 부유한 교회였는데 그것은 우상숭배와 연관된 경제적 힘에 의존한 결과였습니다. 라오디게아 도시는 좋은 수원지가 없어서 근처 히에라볼리에서 따뜻한 물을, 골로새 지역에서 찬 물을 수로를 통해 공급받았는데, 그것이 도착할 때쯤에는 미지근하고 오염된 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들의 환경에 빗대어 그들의 영적 무능을 미지근한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또 라오디게아는 은행제도와 안과 의술학교와 옷감 교역으로 유명했지만 영적인 부요와 안목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흰 옷을 사서 수치를 가려지게, 안약을 사서 발라 눈이 보이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교회였기에 20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문 밖에 계신, 관계가 단절된 분으로 표현하셨고, 앞의 14절에서는 영적으로 죽은 교회를 소생케 하시는 창조의 근본이신 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고난과 유혹 속에서 충성된 종으로 인내하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늘 새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끝까지 이기는 자에게 자신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교회들에 대한 주님의 격려와 경고에서 공통된 문제는 우상숭배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자기 목숨과 안전을 소중히 여길 때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등한 것들을 신처럼 여기고, 두려워하고, 섬기게 됩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의 종이 아닌 헛된 것들의 노예가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해 다양한 경고를 해왔는데, 신약의 교회들 역시 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한 주님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주님 자신이 누구이신지 알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1장에서 촛대들 사이에 계신 주님의 형상이 각 교회들의 상황과 문제에 맞게 반복해서 전달되었습니다. 천사와 성령을 보내시는 분, 처음이고 마지막이신 분,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심판의 주체이신 분,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다 아시는 분, 주석 같은 발로 밟아 심판하시는 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열고 닫으시는 분, 성부와 함께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 주님은 교회들에게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과 교회들이 당하는 고난과 유혹을 없애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알고, 예수님 자신을 믿고, 예수님 자신의 것을 함께 누리는 것을 소망하면서 인내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면류관을, 자신의 왕좌를, 자신의 나라를 끝까지 이긴 자에게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소유하신 어떤 것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함께 누리고, 하나가 되는 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어떤 물건이나 소유가 결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든 것을 가지고 성취해도 고독과 우울함을 해결하지 못하듯, 진정한 행복은 나를 완전히 아는 존재가 나를 인정해주고 수용해주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아시고, 용서하시고, 백성삼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오는 복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주님 자신을 원하도록, 오직 예수님 자체로 위로와 소망을 얻도록 자신을 나타내시고, 자신을 바라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소망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유혹과 환난 속에서 집중해야 할 우리의 일입니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목숨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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