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8:6-11:19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는 앞의 일곱 인 심판이나 오늘 본문의 일곱 나팔 심판에 등장하는 장면들의 순서가 역사 속 사건들의 시간적 순서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일곱 인, 일곱 나팔, 그리고 나중에 살필 일곱 대접은 모든 역사 속에서 늘 반복되고, 긴밀하게 연관되어 일어나는 심판으로써 이미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일어날 심판에 대해 말합니다. 지난 시간의 일곱 개의 인 환상은 성도들의 관점, 성도들이 통과해야 하는 환난이었다면 일곱 개의 나팔 환상은 동일한 역사 속 환난에 대한 불신자들의 관점이고, 그들에 대한 처벌을 말합니다. 이 일곱 나팔 심판은 출애굽 재앙과 여리고성 나팔을 배경으로 합니다.
먼저 첫째 나팔 심판에서 피 섞인 우박 불이 땅의 삼분의 일의 수목과 풀을 태웠다는 것은 식량이 되는 재료들에 영향을 미쳐 기근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나팔 심판에서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는데, 구약에서 산은 나라를 상징하는데(사, 슥-산들에 대한 심판, 산들이 낮아짐), 본문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가리킬 때도 있고, 세상의 나라들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다에 던져진 큰 산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큰 나라입니다. 또 애굽의 열 가지 재앙에서 본 것과 유사하게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었습니다. 배들이 깨지는 것은 식량 조달에 영향을 미치는 해상무역을 몰락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나팔 심판에서 등장하는 별은 죄인들의 수호신 격인 악한 천사들을 의미하는데, 그 별들이 강과 물에 떨어져 쓴 물이 되고. 그들이 숭배하던 것에 의해 쓴 고통을 당합니다. 이렇게 첫째에서 셋째 나팔 심판은 공통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이 먹는 것들의 공급을 끊으시는 심판의 연속입니다.
넷째 나팔 심판에서 어둠은 눈에 보이는 빛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에 빠진 불신자들이 어둠의 영역으로 분리되는 것,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13절에서 독수리가 등장해서 ‘화, 화, 화가 있으리니’라고 선포하는 것은 이미 나온 네 종류의 나팔 심판과 뒤에 나올 나머지 세 종류의 나팔 심판을 구별시키고, 뒤의 것이 훨씬 무서운 것임을 드러냅니다. 앞의 네 가지 나팔 심판은 식물들, 땅, 바다 같은 환경에 가해진 심판이었는데, 악인들이 그것으로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뒤에 나오는 세 가지 나팔 심판은 악인에게 직접 가해지는 심판입니다.
다섯째 나팔 심판에서는 셋째 나팔 심판에서 등장한 악한 천사를 의미하는 별이 또 등장합니다. 그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마귀들의 거처로 알려진 무저갱을 열자 연기가 올라오고 어두워지는데, 이 어둠은 영적인 무지를 상징합니다. 또 그 무저갱에서 메뚜기들이 나옵니다. 출애굽 재앙에 나오는 메뚜기 재앙에서는 실제 메뚜기들이 밭의 채소들 즉 음식이 되는 것들을 먹어 치웠지만, 여기서 메뚜기들은 마귀적 존재들의 상징이고 농작물이 아닌 이마에 인침을 받지 못한 불신자들에 직접 영향을 미칩니다. 메뚜기들의 활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신자들이 징계의 고통 때문에 차라리 죽겠다는 생각을 할지언정 하나님께 회개하지는 않는 고집스런 상태가 되도록 사로잡는 것을 상징합니다.
여섯째 나팔 심판에서는 말 탄 천사들이 등장하는데 말들이 입에서 재앙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말들의 입에서는 구약의 소돔과 고모라에서 등장하는 불, 연기, 유황이 나오는데 이것들보다 더 두려운 것은 19절이 말하듯 그 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19절에서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는 것은 말들의 꼬리까지도 사악한 입을 가진 뱀과 같다는 것인데, 그 말들의 입이나 꼬리가 모두 뱀의 입 같아서 마귀의 말을 쏟아낸다는 뜻입니다. 즉 여섯째 나팔 심판은 악인들이 어떤 무기나 전쟁에 의해 육체적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추종한 거짓 가르침과 속임수에 의해 영적인 사망을 당하는 것이 훨씬 비참함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사실, 진리보다 거짓말을 더 좋아합니다. 거짓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생 중에 복음을 듣고 신앙생활 할 기회가 여러 번 있어도 무시하고 대적하다가도 거짓 이단에는 쉽게 넘어가는 일들이 흔히 일어납니다.
이제 일곱째 나팔 심판인데, 지난시간 여섯째 인 심판과 일곱째 인 심판 사이에 해석을 위한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처럼 여기에도 일곱째 나팔 심판 전에 삽입된 설명이 있습니다. 10장부터 11장 13절까지 그것입니다. 먼저 10장에서 중요한 것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머리에 무지개가 있고,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발은 불기둥 같고, 손에는 두루마리가 들려 있고, 목소리가 우레 소리 같은 천사인데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2절, 5절, 8절에서도 예수님은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로 반복해서 묘사됩니다. 6절을 보면 그 성자 예수님께서는 창조주이신 성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지체하지 않으시고 실행하신다고 말씀하셨고, 9절에서는 요한에게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요한이 두루마리를 삼켜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보고 들은 것을 전달해야 하는 사명을 의미하고, 그것이 입에는 달지만 배에서 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을 그냥 두시지 않는다는 심판의 메시지가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지만, 세상은 그런 심판의 메시지마저 배척하고 핍박하기 때문에 성도가 호된 고난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즉 10장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권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데, 그 권세가 어느 정도 교회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성도들은 기쁨과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앞의 10장에서는 요한이 예언을 전해야 할 소명을 다시 받았다면, 11장은 요한이 다시 전해야 할 그 내용을 다룹니다. 1, 2절에서 성전과 제단 안쪽에 있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것은 주님께 충성된 자들의 구원의 확실함을 의미하고, 성전 바깥마당에 있는 자들을 측량하지 말라는 것은 그들이 겉으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결국 배교하기 때문에 심판받을 것을 의미합니다. 앞에서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내용이 나왔다면 여기서는 성전과 동일시됩니다. 다음으로 출애굽 재앙과 유사한 것을 일으키는 자들로서 두 증인이 3절부터 등장합니다. 이 두 증인은 애굽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면서 심판을 일으킨 모세, 우상숭배자들에게 경고하고 처단했던 엘리야의 역할을 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두 증인은 11장 끝까지 ‘그들’, ‘두 선지자’로 표현되는데, 모두 동일하게 주의 종들과 교회를 가리킵니다. 악한 세상은 이 두 증인을 죽이려 합니다. 10절을 보면 그 두 증인들이 죽었을 때 이 세상은 잔치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교회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죽임당하고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가 전한 진리에 의해 악한 세상은 심판을 당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일곱째 나팔 심판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완전한 심판을 행하시고 자신의 완성된 나라를 세우시는 것을 묘사합니다. 일곱째 나팔소리는 여호수아서에서 일곱째 날 나팔 소리에 여리고가 무너지는 장면처럼 하나님의 승리를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미 심판 가운데 있음을 말합니다. 물론 최종 심판이 있지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부터 심판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배척하고, 그로 인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더욱 고집스러워지고 영적인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갑니다. 그래서 최종 심판이 있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과 결별한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악인들이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이미 심판 가운데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겉으로는 고통을 받지 않아도, 하나님을 등진채로 쾌락과 자기사랑과 자기숭배에 빠져서 밝고 만족이 넘치는 그늘 없는 표정으로 살아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사는 태도가 없으면 이미 심판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불신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할 이유들 앞에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만 불행과 심판 속에서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저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인하면서도 죽음 앞에서의 허무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직감하기 때문에 그 허망함을 회피하기 위해 헛된 위로와 거짓 해결책과 속이는 희망을 추종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말에 더욱 넘어가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교회를 통해 복음을 듣고, 고난을 통해 깨달을 회개할 기회를 얻지만 오히려 완고해지고 악한 길로 계속 간 것은 최종심판에서 자신들에게 내려지는 영원한 심판이 합당하다는 근거로 사용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닙니다. 불신자들처럼 고난을 통해 영혼이 각성을 하지 못하는 것, 더욱 고집스러워 지는 것,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면서 등지는 것, 영적인 어둠에 빠지고 거짓을 추구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고난은 물론 우리를 괴롭게 하고, 외롭게 하고, 어둡게 하지만 그러나 우리를 정결케 하고, 우리의 실상을 깨닫게 하고, 우리의 믿음이 진실한 것인지 진단하게 해줍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고난을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게 합니다. 세상에 헛된 기대를 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합니다. 악인들에게 고난은 최종 심판을 더욱 확증하는 과정,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을 증명하는 과정이 되지만, 성도들에게 있어 고난은 최종심판 때까지 주님을 의존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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