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6:1-8: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6장부터 8장 5절까지는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두루마리의 봉인 일곱 개를 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일곱 개중 여섯 개의 봉인을 떼는 장면은 6장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일곱 번째 인을 떼는 장면은 이어서 바로 나오지 않고, 선택하신 자들이 이마에 인을 받기 까지 환난이 통제되는 것과 하나님께 경배하는 장면이 중간에 길게 나옵니다. 그것이 7장입니다. 그런 후에 8장에서 일곱 번째 인을 떼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먼저 첫 번째부터 네 번째 인을 떼는 장면에는 말 탄 자들이 등장합니다(스가랴 6:1-8). 예수님께서 인을 떼실 때마다 천사들로 여겨지는 네 생물 중 하나가 말 탄 자들을 부릅니다. 각기 다른 네 종류의 색상을 가진 말을 탄 자들은 세상에 재앙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첫 번째 흰 말을 탄 자는 면류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 존재가 흰 말을 탔고,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던 대로 이 말을 탄 자들은 모두 한 그룹이고, 모두 사악한 성격을 가졌습니다. 사탄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말 탄 자가 흰 말을 탔다는 것은 사탄이 처음 등장할 때 자신을 광명의 천사처럼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거짓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기면서 나아갔다는 것은 세상을 속이고 유혹하고 정복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것을 묘사합니다.
주께서 둘째 인을 떼실 때 붉은 말을 탄 자가 칼을 가지고 나오는데, 이 때 부터 사탄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는 칼로 세상 민족들에 다툼과 분란을 일으켜서 평화를 깨뜨리고 서로 죽이게 합니다. 세 번째 인을 떼실 때 검은 말 탄자가 저울을 들고 나오는데, 그에게 저울이 들렸다는 것은 기근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세계에서 흉년의 때에 양식을 저울에 달아 배급하는 관습 때문입니다. 네 번째 인을 떼실 때에 청황색 말을 탄 자가 나오는데 그 이름이 ‘사망’이고 그를 뒤 따르는 것은 ‘음부’ 즉 지옥이었습니다. 네 번째 말 탄 자는 첫 번째부터 세 번째 말 탄 자들의 심판이 종합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고, 그것으로 세상을 하나님에서 이탈시키고 재앙 가운데 처하게 하는데, 비로소 그들의 정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께서 다섯 번째 인을 떼실 때는 말 탄 자들에 의해 고난당하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간청을 하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9절에서 고난을 받는 성도들을 ‘죽임당한 영혼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께서 ‘죽임당한 어린양’으로 묘사되신 것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위해 핍박을 당하는 것이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고난과 동일시되는 것을 요한이 본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세상 악한 자들을 심판하셔서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속히 드러내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라고 외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흰 두루마기 옷은 그들이 악한 세상에서 죄인들처럼 핍박을 당하지만 어린양 안에서 죄 없는 깨끗한 자로 입증될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의 고난은 교회 역사 전체 속에서 계속되고 점점 극에 달합니다. 6장 11절이 말하는 대로 잠시 동안 쉬는 기간이 있지만 계속 고난이 있을 것이고, 그 수가 차기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인을 떼실 때 큰 지진이 나고, 태양이 어두워지고, 달은 핏빛으로 변하고, 별들이 떨어집니다. 세상 불신자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심판을 직감하면서 숨습니다.
다음으로 일곱 번째 인을 떼는 장면이 나오기 전 앞에서 말한대로 다른 장면이 등장합니다. 7장 전체가 그것인데 여기서 성도들이 고난을 겪는 중에도 하늘의 보호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과 하나님이 찬양받으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세상을 멸망시킬 것 같은 말 탄 자들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칠 때까지 해치지 못하도록 다른 천사들의 통제를 받습니다. 인을 치는 것은 자기 것이라고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들로, 하나님의 소유로 여겨집니다. 마치 출애굽 때 집 문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놓아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것처럼, 성도들은 비록 환난 중에 고통을 당하지만 믿음을 잃지 않고, 영적인 보호를 받으면서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참고로 13장 이후에 등장하는 짐승의 표를 가진 자들은 이런 인침을 받은 자들과 대조되는 멸망당할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침을 받은 자들이 144000명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12지파, 열 두 사도에서 나타나는 12라는 숫자의 완전 개념에서 나온 상징입니다. 12를 12로 곱하고, 1,000이라는 큰 수를 붙여 완전성을 강화시킨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합니다.
7장 9절에서 17절은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10절에 나오는대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라고 찬양하고, 14절에서 말하듯 환난을 통과하는 하는 자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다시는 고통을 겪지 않고, 하나님으로 인해 완전한 만족과 위로를 얻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드디어 8장에서 일곱째 인을 떼시는 최후 심판 장면이 나오는데 처음에 반 시간의 침묵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직감해 두려움에 경직되고 침묵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침묵 이후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최종 심판은 앞의 다섯 번째 인을 때는 장면에서 나온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라는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분명히 알고 계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응답하시기 위해 반드시 심판을 실행하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일곱 인 심판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악한 말 탄 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냄을 받는 것과 고난의 범위를 통제하시는 것은 주께서 고난을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원인을 애초에 말끔하게 없애주시거나 악한 세력들을 신속히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그것들이 우리를 괴롭히도록 이 땅에 보내시고 조절하신다는 것 때문에 당황하거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악한 존재들이 자기 뜻대로 활동하도록 잠시 허용하시는 것, 또 세상에 고난을 허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악행으로 애굽에 팔려간 일을 이스라엘이 큰 민족이 되는 기회로 삼으신 것처럼, 또 바로의 악행을 애굽의 심판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계기로 된 것처럼 하나님은 세상 힘의 논리와 방법이 아닌 고난으로 자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사탄의 권세, 하나님의 대적자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패배가 되게 하셨고, 고난당하고 죽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음으로 패하고,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으로 죄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심판할 권리를 얻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원하지 않는 방법인 고난을 통해 자신의 나라를 이루십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처음부터 고난을 당하셨고,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서 구속을 위한 고난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고난을 겪는 이유는 승리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으로 승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묶이게 됩니다. 그들이 바로 인침을 받고, 두루마기를 받고,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은 자들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겪고,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경험하는 자는 세상 어떤 위로보다 주님께서 자신을 온 세상에 드러내시는 것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 악한 세상이 무시하고 대적해 온 그 분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모습으로 오실 때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어서 속히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눈물을 씻어 주시고, 성도들의 고난이 주님을 위해서였음이 드러나는 것이 가장 큰 위로임을 알게 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 ⑦ (계 12:1-15:4) (0) | 2019.12.08 |
---|---|
요한계시록 ⑥ (계 8:6-11:19) (0) | 2019.12.01 |
요한계시록 ④ (계 4:1-5:14) (0) | 2019.11.17 |
요한계시록 ③ (계 2:1-3:22) (0) | 2019.11.10 |
요한계시록 ② (계 1:9-20) (0) | 2019.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