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2:1-15:4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12장에 등장하는 여인은 신실한 신앙공동체, 주를 위해 고난당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여자가 해를 입고 밝은 빛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머리가 일곱 개이고 뿔이 열 개인 용이 등장합니다. 이 용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악한 나라와 마귀 자신을 상징합니다. 용은 여자의 아이, 즉 메시아를 죽이려 하지만 그 아이는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아이를 낳은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가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있게 됩니다. 천이백육십 일은 앞의 11장에서 두 증인인 교회가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고난당하는 기간으로 표현되는데, 마흔두 달로도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3년 6개월을 의미하는데, 같은 시간을 여러 단위로 표현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기간과 엘리야의 심판 사역기간과 다니엘 8장에서 하나님의 성소가 공격받는 기간 등을 생각나게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에도 성도들의 고난이 있을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는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한 것, 엘리야가 위협가운데 선지자 사역을 감당했던 것과 같은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7절에서 미가엘은 하늘에서 이스라엘의 대표 천사로 활동하는 존재인데 사탄 마귀를 땅으로 쫓아냅니다. 마귀가 쫓겨난 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승리를 반영하는 것이고, 쫓겨난 마귀는 우리가 사는 땅에서 환난을 일으키지만 그것은 자신이 결국 멸망당할 것을 알기 때문에 일으키는 최후의 발악입니다. 여자를 위협하는 용은 에덴동산에서 첫 여자 하와를 속였던 것처럼 아이를 낳은 여자가 의미하는 교회를 속이려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전멸시키려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부터 재림까지의 시간 동안 성도들이 그런 고난을 겪지만 그것은 이미 보장된 승리 속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13장에서 용으로 묘사된 마귀는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으로 묘사된 악한 나라들에게 권한을 주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하고, 참된 왕권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모방해서 신성모독적인 일들을 하게 합니다. 눈에 보이는 나라들은 흥망성쇠를 겪으면서 한 나라의 시대가 저물면 다른 나라가 떠오르지만 마귀는 그 다음 나라를 통해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특별히 13장은 이 악한 짐승의 특징을 말하는데 소름끼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앞의 5장 6절에서는 예수님이 일곱 뿔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되고, 13장 1절을 보면 마귀는 자신을 10개의 뿔을 가진 자로 나타나는데 이는 겉으로 보기에 마귀가 그리스도보다 자신이 승리자인 것처럼 위장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3절을 보면 마귀는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7절을 보면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13절에서 큰 이적을 행합니다. 16절을 보면 짐승에게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마에 표시를 받게 하고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17장을 보면 그는 예수님처럼 마지막 때에 나타납니다. 이렇게 마귀는 그리스도에 의해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을 찬양하게 하고,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강력하다고 미혹하면서 복종하게 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활동은 13장 5절이 말하듯 마흔두 달이라는 하나님이 제한하신 시간 속에서 한정됩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마지막 때 나타나지만 멸망당하기 위해 옵니다.
18절에서 마귀를 육백육십육이라고 말한 것은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666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흔히 게마트리아라는 해석방법을 사용해왔습니다. 이것은 고대 세계에서 알파벳 각 글자에 숫자를 부여해서 사용한 것을 응용하는 것입니다. 특정 인물의 이름의 철자들이 가진 숫자를 계산해서 666인 사람이 그 육화된 사탄,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네로 카이사르, 히틀러 같은 인물들이 그것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러나 666은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정확하게 계산하라고 알려준 숫자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숫자들이 그러하듯 분명한 상징입니다. 여기서 6은 7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신적 완전성과 대조하기 위한 숫자입니다. 앞서 등장한 일곱 인, 일곱 나팔 심판처럼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성취하는 것의 완전성은 7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모든 간사함과 그리스도를 흉내 내는 것은 사악함의 극치이지만 불완전한다는 것을 6으로 상징한 것입니다. 특히 사탄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모방하지만 본질적으로 악하고 불완전함을 말하기 위해 6을 세 번 반복한 666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음 14장에는 앞에서 일곱 인, 일곱 나팔 환상에서 최종심판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장면이 항상 있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동일하게 찬양과 심판이 등장합니다. 그 장면에서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시온산, 즉 지금 언제나 하늘에 있으면서도 마지막 때에 임할 그 나라를 상징하는 그곳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모든 시대의 성도를 상징하는 14만4천이 새노래로 어린양과 성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사탄에게 복종하는 나라들을 의미하는 바벨론을 의지하고, 거기서 나오는 쾌락과 생존을 의미하는 포도주를 마십니다. 그런 악한 포도주를 즐거워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포도주틀에서 포도가 밟히는 것처럼 참혹한 피흘림을 겪는 것과 같은 심판을 당할 것임을 말합니다.
사탄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욱 강력해보이고, 하나님보다 우리를 더 위하는 것처럼 속입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도록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자기 백성들을 모으기 위해 당근과 채찍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설 때, 핍박을 가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이 세상 나라들에 지배당하면서 만족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것들의 모조품으로 미혹합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구원자 어린양을 따라할 뿐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온전한 나라 역시 자신이 줄 수 있다고 속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탄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 아니라, 자신과 함께 지옥에 처할 자들을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렇게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어울리는 것으로 현혹하고, 멸망할 이 세상에 복종하도록 자기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고난을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 나라에 현혹되지 않고, 우리의 죄를 보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굴복하도록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보아야 하고, 천상의 나라를 봐야 합니다. 결국 이 세상은 심판 받아 사라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반복해서 그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린양과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하늘의, 그 나라의 모습을 자꾸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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