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7:1-19:2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본문 17장부터 19장은 앞의 일곱 대접 심판에 나타난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구체적으로 해석해주는 내용입니다. 바벨론은 구약 시대에 이미 멸망한 바벨론 왕국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권세를 가리킬 뿐 아니라 배교한 이스라엘과 교회를 포함합니다. 본문에서 바벨론은 짐승을 탄 음녀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짐승의 폭력성과 음녀의 미혹하는 속성이 세상 나라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이 환상은 음녀에 동조하는 세상 나라와 권세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어떻게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지 말합니다. 역사 속에서 바벨론 같은 반하나님적인 나라들이 심판을 받았던 것처럼, 앞으로도 심판을 받고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을 예상하게 합니다.
17장 2절과 6절을 보면 그 음녀와 나라들이 음행의 포도주와 성도들의 피에 취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일을 즐기고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 권세와 나라들은 힘을 가질수록 자신들의 능력과 권한을 짐승에게 내어주고 세력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대적하는 일을 행합니다(13절).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멸망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편이었던 짐승과 열 뿔이 음녀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 열 뿔과 짐승이 음녀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죽어 개들에게 먹히는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배교한 교회나 세상 악한 세력은 자신들이 의지하고, 믿었던 상대의 배신으로 멸망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과 그 세력은 하나님을 대항하려고 힘을 모으지만 결국 자기들끼리의 불신과 탐욕에 의해 서로를 공격하고 맙니다. 그것이 악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하듯 하나님을 배반한 세상은 배반으로 망합니다. 그것을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악인은 자기를 위한다고 하지만 자기를 죽이는 자충수를 둡니다. 그리고 그런 결말은 17절의 “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라는 말대로 하나님께서 사탄이나 악한 세력들이 내란과 분란을 통해 스스로 멸망하도록 심판하시는 결과입니다. 바벨탑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항해서 결집하고 세력을 모았지만 결국 자기들끼리 분란이 일어나 흩어진 것처럼 마지막을 향해 가는 역사 속에서도 악의 결집과 분열과 자멸은 계속 일어나고, 최종적인 멸망도 그런 요소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18장에서는 땅을 환하게 비추는 천사가 등장하는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바벨론의 죄에 대해 매우 직설적으로 비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벨론이 영적으로 부패하였고, 물질적인 부를 가지고 자기 안전을 도모하고, 결코 슬픔과 수치를 당하지 않겠다고 교만한 태도를 보인 것을 지적하십니다. 주께서는 그런 바벨론을 반드시 무너뜨리실 것인데,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징계하시냐 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핍박한 방법 그대로 동일하게 갚아주실 것이라고 무섭게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는 그런 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9절부터는 바벨론이 당할 심판의 큰 부분을 경제적인 몰락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매우 구체적으로 상품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경제적인 부분을 치십니까? 반하나님적인 이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인한 불안과 다가올 심판 속에서 저항할 힘을 모으기 위해 필수적으로 물질적인 부를 쌓습니다. 그렇게 경제력을 기초로 군사력을 키우고, 그것으로 다른 나라들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의 전선, 세력을 이루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헛된 자존심과 안전과 허영심과 교만을 지지해주는 물건들, 경제 제도를 무너뜨리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심판을 받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경제적으로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3장에서 짐승이 자기 사람들에게 표를 받게 하고, 표를 받지 않는 자들은 매매하지 못하도록,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핍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이 경제적인 심판을 겪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경제적으로 핍박한 그대로 그들도 당하게 하는 동일복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께서 음녀를 심판하신 것을 의로운 일이라고 천상의 존재들과 성도들이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양하는 장면이 19장에 나옵니다. 7절 부터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기뻐하는 것이 나오는데, 세마포 옷이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행위 구원을 지지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 표현의 배경은 이사야 61장 10절인데, 여기서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라는 표현을 통해 옷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그 옷은 마지막 혼인 잔치에 빛을 발하지만 이미 주어진 지켜야 하는 옷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줄 알고 거룩한 행실을 인내 가운데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16장에서(15절)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음녀에게 유혹되어 벌고 벗고 있지 않도록 깨어있으라는 경고도 이런 세마포 옷의 교훈을 조명해 줍니다. 결국 심판 때 세마포 옷은 성도들이 세상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기초해서 인내하고 거룩한 삶을 산 것이 옳았음을 증명 받는 것을 상징합니다.
앞의 17장에서는 음녀 바벨론을 따르던 자들이 반역하여 음녀를 공격했었는데, 19장에서는 그 음녀를 공격한 자들도 남김없이 심판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탄과 세상 악한 권세의 정체가 구체적으로 폭로되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십니다. 그 모습은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으로 만국을 치고, 원수들을 밟으시고, 철장으로 다스리시고, 짐승과 그를 따르던 자들을 영원한 유황불에 던지시는 두려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세상에 대해서는 심판자로서 오시지만 자기 백성인 성도들에게는 신랑으로서 오십니다. 세상 끝으로 갈수록 이 세상의 정체가 드러나고, 예수님도 더 분명하게 드러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바벨론으로 상징되고 있는 세상의 제도와 인간도시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결핍과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물질을 의지하고, 자기들끼리 세력을 모으고, 도시를 형성합니다. 우리 역시 도시를 좋아합니다. 도시가 주는 규모와 편리함과 나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주는 이미지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에덴이라는 동산에서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도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도시는 하나님의 도시와 무관합니다. 이 도시는 하나님께 반역하고 도망치고 다가올 심판에서 자신들을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이루는 도시입니다. 하나님의 도시에 대항하기 위한 도시입니다. 이 도시가 번영할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필요하게 여기고, 오직 돈과 쾌락을 추구할 것이고, 자신의 행위가 주는 불안감과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 자기 편을 모아 세력화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짐승을 탄 여인과 뿔 들이 하는 일입니다. 도시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도시들과 국가들이 하는 일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의 일은 파국을 향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죄인인 인간과 인간의 도시, 나라에 대해서 비관적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상당수 목사들과 교회들은 그런 생각이 부정적인 사고라고 일축해버립니다. 지옥을 더 이상 진지하게 여기지 않듯 종말도 무시해버립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 믿음을 가져야지 그런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바벨론이라는 역사 속 한 나라를 가지고 전 역사를 전망하고 경고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은 세상 나라들이 바벨론이 보여준 그 패턴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도 자신이 과거에 보여 온 패턴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세상 심리학과 인간의 뇌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증명하듯, 한 나라와 세상 역시 과거에 보여 온 패턴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망할 것을 알아도 그 길을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성경, 특별히 우리가 살피고 있는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전망을 계속 반복하고 있고, 지금도 그 전망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고, 결국 멸망을 통해 자증할 것입니다. 우리는 도시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 도시를 슬퍼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지 않게 하는 허영심과 교만을 이겨내면서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 ⑪ (계 21:1-22:5) (0) | 2020.01.05 |
---|---|
요한계시록 ⑩ (계 20:1-15) (0) | 2019.12.29 |
요한계시록 ⑧ (계 15:5-16:21) (0) | 2019.12.15 |
요한계시록 ⑦ (계 12:1-15:4) (0) | 2019.12.08 |
요한계시록 ⑥ (계 8:6-11:19) (0) | 2019.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