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요한계시록 ⑩ (계 20:1-15)

따뜻한 진리 2019. 12. 29. 21:09

요한계시록 20:1-15

 

    우리는 지난 시간 17, 18, 19장에서 짐승을 탄 음녀인 큰 성 바벨론이 최종심판을 받고 나서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종말의 전체적인 그림이 완성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랑이셨던 예수님이 1911절부터 다시 전사로서 등장하시면서 본문 20에서 용, 즉 옛 뱀을 무저갱에 천년동안 결박하시고 성도들은 왕노릇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분명 앞에서 예수님은 세상 악한 권세를 멸하고 혼인잔치로 마무리되었는데, 또 다시 예수님이 무장을 하시고 싸우신다는 것은 좀 이상합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연속될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기록된 순서대로 일어난다고 해석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주장을 전천년설이라고 합니다. 전천년설은 천년왕국 전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고 그로 인해 천년동안의 종말적 마무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천년설 안에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서 세상이 심판 받는 동안 성도들이 휴거되어 보호받는다는 주장도 있고, 이스라엘이 다윗과 솔로몬 때의 영광을 회복한다는 견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0장은 앞의 음녀 바벨론의 최종심판에 이어지는 다음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처럼 마지막 아름다운 장면을 가까이 당겨 먼저 보여주었다가, 이번에는 시점을 멀리해서 그 아름다운 장면까지 성도들이 겪어야할 긴 현실에 대해 보여주는 장면인 것입니다. 즉 앞의 몇 장들이 최종 종말 때에 비중을 두었다면 여기서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 사이의 긴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점들을 줌인, 줌 아웃하면서 수차례 반복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말하는 천년왕국은 시간 적인 실제 천년을 말하지 않습니다. 천년은 초림과 재림 사이의 오랜 인내가 요구되는 교회의 시대를 의미합니다. 즉 천 년의 기간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천사가 등장하는데, 그는 18장에서 바벨론을 심판하려고 땅을 밝히면서 내려온 천사와 동일한 존재입니다. 그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용, 즉 옛 뱀이라고 불리는 사탄을 잡아 무저갱에 결박시켜 세상을 미혹하지 못하게, 속이지 못하게 합니다. 무저갱은 지하 땅 속의 어떤 장소가 아니라 영적인 하늘과 반대되는 사탄이 활동하는 영역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이 사탄이 무저갱에 갇혔다고 해서 완전히 무력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세 때까지 사탄은 여전히 활동합니다. 그리고 최종 심판 때에 사탄은 잠깐 풀려나서 곡과 마곡을 미혹해서 하나님을 대항하게 합니다. 곡은 마곡에 사는 왕으로서 에스겔에 등장하는데 실제 인물과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반하나님적인 모든 나라들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사탄이 결박되었을 때는 통제되었다가 마지막에 잠시 풀려날 때 다시 허용되는 능력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미혹하는 능력입니다. 그가 사람들을 속여서 하나님께 바른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데 그 능력을 주님께서 제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중요한 특기인데, 옛 뱀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재확인됩니다. 즉 사탄이 하와를 속여서 전 인류를 죽게 하였고, 전 세상을 어둡게 속여서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만들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그 사탄의 능력을 막으시고, 자신의 백성들을 깨워 빛 가운데로 불러 모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탄은 이런 일이 자기에게 닥치는 것을 막으려고 구약의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방해했고, 그런 그의 노력이 앞의 12에서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삼키려는 용의 모습으로 묘사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시도는 실패하고 그 약속된 아이가 태어나자 이 용, 사탄은 쫓겨나게 됩니다. 누가복음 1018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나 그 귀신들을 쫓아내는 이적들을 보여주신 것은 그런 사탄의 제압됨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려고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모든 나라들이 꾐에 빠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습니다. 사탄의 꾐에 빠진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계속 멸절시켜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고, 예수님의 주권이 선포되었고, 성령께서도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도록 일하시기 때문에 사탄은 결박되어서 이전처럼 거의 모든 사람들을 미혹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교회 시대는 이전에는 없었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어둠 가운데 불러내셔서 구원하시는 놀라운 시간입니다.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천년왕국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구약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점점 소멸하고, 남은 자들이 희박한 것으로 묘사하는데 반해 신약은 점점 왕성하고 허다한 무리로 묘사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이 가시적으로 많아질수록 사탄의 핍박은 더욱 노골적이게 됩니다. 그래서 4절에서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라고 성도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시대는 승리의 시대, 구원의 시대인 동시에 더욱 거센 저항과 핍박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사탄과 그의 꾐에 넘어간 세상 나라들이 심판에 대한 위기감과 하나님에 대한 미움을 가지고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을 핍박해서 죽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 성도들의 패배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나약한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고, 세상을 심판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셔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주신 것은 신약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데, 즉 부활이 나중에 심판 때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지금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누리는 것에서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진리 안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미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 진리를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524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라고 말합니다. 또 사도바울은 로마서 64에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여길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부활 속에 현재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 하나님 편에서 선 것으로 인한 고난을 현재 겪는 것으로 경험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순종을 위한 고난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은 성도가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부활한 자로 여김받는 이 신비로운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여겨주시는, 동일하게 여겨주시는 이 신비가 기독교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과 성도를 한 몸으로, 신랑과 신부로 말하는 것 역시 결국 이 신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성도들을 가리키는 표현들 즉 6장과 18장에서 죽임 당한 영혼들, 또 본문 4절의 목 베임 당한 영혼들이라는 표현 역시 5장과 13장에서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이 지시하는 예수님동일시되고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 이해 속에서 우리가 현재 부활 속에 있음을 알고 인내하면서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를 예수님과 동일시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처럼 부활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영적으로 부활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17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5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129절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골로새서 124절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신약 저자들은 고난을 통해 자신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것을 중요하고도 신비한 원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구원받아야 할 우리 자신과 대신 죽임당한 제물이 그런 관계였고, 신약에서 비로소 예수님과 우리 자신이 그런 동일시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것이 믿음에 담겨져 있어야 하고, 그것은 고난을 통해 신비하게 경험되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6절에서 성도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왕노릇 하는 다스림 역시 힘과 지위가 아닌 예수님처럼 고난당하는 것으로 다스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 동일시의 은혜를 모르는 악인들은 자기를 의지했기 때문에 12, 13절 말씀대로 심판 때 자기 행위에 근거한 심판을 당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신과 동일시 해주시는 어린양의 완전한 순종에 근거해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보장되어 있음을 믿고 죽음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