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1:1-22:5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분에게서 우리의 가치를 확인받고,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죄인은 하나님을 통한 자기 발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을 탐닉하고 중독되는 증상을 드러냅니다. 그런 자기사랑과 이 세상사랑은 우상숭배이며 짐승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자기 가치를 발견하는 자입니다. 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자신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성도들을 동일하게 여겨 주시는 것은 구원의 방법인 동시에 우리가 영광스러운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사실 때문에 성도는 고난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면서 영광과 기쁨을 누리길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이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그것을 보여줍니다. 성도를 괴롭히던 적들은 온데간데없고, 아버지가 자녀를, 또 신랑이 신부의 눈물을 닦아주듯 모든 슬픔을 보상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장면입니다.
1절과 10절을 보면 성령에 의해 사도 요한이 높은 곳, 높은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성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에스겔이 천사에 의해 매우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경험한 장면이 재현된 것으로써 사도요한을 통해 주신 요한계시록이 구약의 예언들의 해석이고 성취임을 하나님이 보증해 주신 것입니다.
요한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도시와 그 안에 있는 성전을 보았습니다. 먼저 16절을 보면 이 도시는 마치 정육면체 모양으로 생겼고, 한쪽 길이가 만 이천 스다디온이라고 하는데, 약 2400km 정도 됩니다. 세상의 어느 도시보다 큰 것입니다. 이 규모는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그런 크기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 민족만으로 구성되지 않고, 세상 모든 민족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사람들이 다 속하게 될 만큼 광대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18절부터 보면 이 도시는 각종 보석들로 되어 있는데, 이는 출애굽기에서 제사장의 흉패에 있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들과 유사한데, 여기서는 구약의 혈통 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백성을 이룰 새 이스라엘 즉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의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12-14절을 보면 동서남북의 각 세 문이 열두 문을 이루고 문들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고, 열두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22장 2절을 보면 열두 열매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앞에서 살핀 대로 측량된 도시의 수치들 만이천 스다디온, 144 규빗과 함께 12라는 숫자와 그 제곱수들이 하나님의 도시의 묘사에 계속 나열이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상징하는 12라는 숫자, 즉 구원받은 백성들이 그 도시를 이룬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외형, 건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부각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도시 안에 성전을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의 도시인 예루살렘 성 중심부에 성전이 있었던 것처럼 요한이 본 하나님 나라 도시의 중심에도 성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요한은 성전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바로 성전이심을 알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 가운데 눈에 보이는 성막이 존재했고, 솔로몬 왕 이후로 건물로 된 성전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는 그런 건물로써의 성전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3절이 말하듯 해와 달의 빛이 필요 없다고 느껴질 만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찬란하게 비춘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 빛을 받아 세상에 반사하는 영광스런 존재가 됩니다. 22장 5절에도 보면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이 땅의 도시가 인간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목적을 가진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도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핵심인데,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성도들까지 영광스러워지고, 하나님 나라 도시가 전체가 성전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성도들이 보석과 수정들로 묘사된 것입니다. 보석들이 아름다운 것은 빛 때문이듯,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 의해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성도들은 본문 가장 앞에서 어린양의 신부로 묘사되었습니다. 결혼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단장한 신부이듯,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아름답게 되는 신부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석, 황금길, 궁궐 같은 집이 핵심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구원받은 우리가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할 때 지금의 이 세상, 21장 1절이 말하는 대로 천지창조 때 만들어진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집니다. 오직 구원받은 성도들만 연속됩니다.
그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땅과 하늘의 성질과 거의 유사한 원리와 정체성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죄인들이 살고 있는 이 땅과 이 하늘은 아닌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부활한 예수님의 몸이 보여주는 것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부활한 몸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의 몸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몸이었습니다. 죽음이 없고, 고통이 없는 몸이었습니다. 우리의 부활할 몸도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몸은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십자가에서 죽기 전의 정체성과 성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알아볼 수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만질 수 있었고, 음식을 드실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새 하늘과 새 땅도 그러할 것입니다. 부활한 육체에 필요한 새 하늘과 새 땅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땅과 이 하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 창조는 종말 때에 극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미 우리의 거듭남으로, 영적 부활로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사람들, 성도들 안에서 새 창조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전 3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엡 2장 21절은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만 성전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까지 성전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처음 창조 때는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다 만드시고 나서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준비된 후에야 사람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말, 새 창조는 사람을 먼저 변화시키시고 마지막에 나머지 전부인 세상을 새 하늘, 새 땅으로 바꾸십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 먼저 새 사람이 된 우리는 아직은 지금의 이 옛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만 변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고난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근거로, 빛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도 그 빛을 반사하여 보석과 같은 존귀함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과 사람들이 그 나라를 기대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세상 음녀는 자신의 길이 행복한 길이라고 우리를 미혹하지만 결국 멸망할 길입니다. 우리가 유명 대학의 졸업장을 가지고 있고, 교양 있는 음악을 분위기 있게 듣거나,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카페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고급 브랜드의 생산량이 한정된 최고급 소재로 만든 옷을 입고, 성공한 사람들이 타는 자동차를 소유해서 타고 있으면 자기가 격이 있고, 괜찮게 살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런 허상들이 주는 거짓된 만족을 즐거워할수록 하나님 안에서 참된 나의 가치를 누릴 새 창조를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겉으로는 고상한 것 같지만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를 높이려 하는 뻔뻔함과 역겨움을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을 알아야만, 우리는 그 나라를 소망할 것입니다. 죄인인 자신을 슬퍼하면서 그리스도를 의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처럼 고난당하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처럼 찬란한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보석들처럼, 빛의 본체이신 그분과 동일한 영광은 아니지만, 그분의 영광만큼이나 우리는 존귀한 가치를 확인하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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