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12-36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오늘 본문은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과 한나의 아들 사무엘의 이야기입니다. 한나는 매년 성전에 갈 때마다 겉옷을 지어갔습니다. 그 옷은 아마도 제사장들이 입었던 흰색 속옷과 파란색 에봇 사이에 입었던 옷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한나는 사무엘이 성전에서 잘 자라도록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사무엘 역시 한나의 바람대로 여호와의 집에서 성전의 일을 배우면서 잘 자랐다고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과는 대조적인 다른 자녀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를 드리러 온 백성들의 제물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일을 하였습니다. 13절부터 말하는, 제물인 고기를 삶는 솥에서 갈고리로 고기를 집어낸 행위 자체가 홉니와 비느하스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 자체는 율법에 보장된 것이었고, 당시 제사장들의 관습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 중의 일부를 음식으로 제공받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갈고리의 살이 낚시 바늘처럼 한 개여야 하는데, 살이 셋 달린 갈고리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또 제사를 통해 기름을 태운 후 삶은 고기만 제사장이 취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고 기름을 태우기 이전의 생고기를 가져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구워먹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정해진 대로 삶는 그릇에서 갈고리로 긁어서 건져지는 것을 먹는다는 것은 제사장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대로 어떤 부위의 고기이든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며 받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자신들의 미각을 위해 구워먹기 좋은 기름이 붙은 부위를, 제사를 드리기 전에 골라서 가져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잘못은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전의 여인들과 동침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25, 34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시고 다른 충실한 제사장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자녀들의 모습을 아버지 엘리가 알게 되고 꾸짖습니다. 24절을 보면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히니라”라고 말합니다. 엘리는 백성들로부터 소문을 듣게 되는 것으로 자식들을 지적합니다. 죄의 결과를 가지고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게 돼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에 방해를 받는다고 해서, 즉 피해가 구체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지적하고 있습니다. 엘리는 자녀들의 악행을 이전에는 몰랐을까요? 그들이 이러한 범죄를 구체적으로 행하기 이전에 그들의 태도와 내면적인 문제를 아버지 엘리는 알지 못했을까요? 하나님은 엘리의 문제를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29절에서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한나가 자신에게 너무나 중요한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 것과 비교가 되게 합니다.
그렇게 본문은 엘리와 아들들을 한나와 사무엘에 비교하게 합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하나님께 드려져 성전을 위한 봉사자로서의 정체성을 위해 에봇을 지어 입혔고, 사무엘은 11절 “여호와를 섬기니라”, 18절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21절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26절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로 묘사됩니다. 이에 반해 홉니와 비느하스는 12절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17절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25절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로 묘사됩니다. 이렇게 상반되는 그 부모들에게는 어떤 결과가 임했습니까? 21절에서 한나는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게 되었고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에 대해서는 25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다고 말합니다.
한나와 엘리가 이러한 결과를 얻게 된 본질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한나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했고, 엘리는 악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30절에서 하나님이 언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한 것과 하나님을 멸시한 차이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봉사자로, 섬기는 자로서 바르게 되도록 애썼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사무친 열망이 이뤄졌을 때 그것을 자신의 소유삼지 않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무엘은 아이 때부터 부모가 자신을 챙겨주는 이유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섬기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아들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엘리는 자신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더 우선이라는 인식을 하며 자라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습게 여기게 된 책임을 부모인 엘리에게 물으셨습니다.
또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와 제사장직을 함부로 여겼습니다. 30절에서 “내가 전에 내 집과 내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직은 대대로 물려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가짐, 태도와 행실과는 무관하게 은혜로 제사장직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주의함 없이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그 위치와 혜택을 당연시하며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주의함이 제사장직을 종교성만을 가진 직업인으로 전락시켰을 것이고, 그 자신들의 소유를 챙기는 수단으로서 지속할 뿐이었습니다. 엘리는 분명히 아들들의 그런 잘못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감하게 인식하고, 바로잡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신 절차대로 백성들의 제사를 돕는 것에서 죄가 처리되는 것과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경험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기에 제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저 음식이 나오는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은혜로 얻은 제물에 대한 자격을 당연한 권리로 변질시켜 제사를 방해하고 제물을 빼앗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필요를 구할 자격이 있지만 그것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판단과 의지, 은혜 베푸심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격을 누리는 것이 익숙해지면서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고, 인간의 무한한 탐욕이 뻔뻔한 기대와 요구를 하게 만듭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아무 조건 없이 제사장이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기회가 되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값없이 얻는 은혜를 우습게 여길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교회를 통해 주시는 은혜는 누리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우습게 여기면서 신앙적인 모든 것들에 냉소를 보이고, 혜택들이 사라지면 언제든 떠날 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인이 되어 교회를 비판하고 냉소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경험한 자들입니다. 한 때 교회에서 여러 가지를 누렸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욕구충족이 더 이상 안 되면 교회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12절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의 말씀대로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알게 될 만한 장소에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엘리의 그것처럼 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이 자칫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하기 위한 훈계를 주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먼저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이어야 하고, 그런 가운데 사랑으로 바로 잡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 엘리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유혹이나 작은 탐심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살짝 빗나간 일을 하고는 하나님이 그냥 두시면 괜찮은가보다 하고 안심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멸시하는 수준까지 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다루는 일에서 있어서 그렇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다룰 때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을 반복적으로, 더 크게 저지르는데도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신다면, 죄가 드러나지 않게 하신다면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해 우리의 죄를 내버려두시는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 우리를 용서하시는 은혜는 너무나 큽니다. 우리에게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이 주어지는 것이 놀라운 것임에도 거저 얻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우습게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위해 독생자께서 어떤 값을 치르셨는지를 알고 믿는 자는 하나님을 멸시할 수 없습니다. 값없이 받는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참으로 존중하며 하나님 뜻대로 행하고자 애쓰게 됩니다.
그런 깨달음이 우선할 때 우리는 지은 죄에 하나님이 직접 진노하시지 않고, 즉각 징계를 하시지 않더라도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기억하며 아파하고 회개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잘못을 훈계할 때 그 사람이 우리의 진심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얻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해야 우리는 엘리와 그 아들들의 비참했던 결과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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