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3:1-21 김영제 목사 (하늘기쁨교회)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여호와의 부르심으로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사무엘이 아직은 젊은 나이였습니다. 1절에서는 ‘아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소년에서 청소년 정도의 범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어릴 때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엘리 제사장의 영적 상태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의 일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 편에서 말씀하시고, 계시하시는 것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 대표격인 엘리가 영적으로 무딘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이 적어진 것입니다.
그 영적 어두움은 엘리의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한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반면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은 여전히 진행 중임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3절 말씀은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에 누웠다고 말합니다. 즉 엘리는 어둠의 상태이고, 사무엘은 꺼지지 않은 등불 가운데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에 누웠다는 것은 언약궤가 놓인 장소인 지성소에 누웠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언약궤가 있는 전 안에 누웠다는 것은 성전에서 신속히 섬기기 위해 그만큼 가까운 성막 내부의 어딘가에서 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을 부르셨는데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어서 계속 엘리에게로 가서 자신을 불렀냐고 물었습니다. 엘리는 자신이 부르지 않았다며 사무엘을 계속 돌려보냈으나, 세 번째에 가서 엘리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신 줄을 알고 다음에 하나님이 부르시면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무엘을 다시 부르시자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엘리 가문에 대한 저주였습니다. 2장에서 먼저 언급된 심판 예고와 함께 종합하면, 엘리의 아들들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엘리 가문에 젊은 자가 없게 하셔서 대를 끊으신다는 것과 제사장으로서의 역할과 권위를 약화시키신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엘리에서 사무엘로 넘어가는 장면에는 당시 이스라엘 종교의 부패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위치해 있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것에 대한 심판,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멸시하는 것에 대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죄에 대해 분명하게, 단호하게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운 심판 사건의 중심에 있는 사무엘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자신에게 처음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선지자로서의 소명이 시작되는 것인데 당혹스럽게도 자신이 스승으로 모시던, 바로 옆에서 시중들었던 엘리 가문의 멸망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엘리에게 그 내용을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무엘은 엘리의 협박에 가까운 요구로 그 내용을 말하게 됩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대로 하실 것이니라.” 이 말은 여호와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뜻대로 이루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엘리가 사무엘을 통해 들은 하나님의 심판 예고를 거부하거나 반감을 가지지 않은 것은 훌륭해 보이지만, 앞선 2:27에서 다른 선지자를 통해 들었던 심판 예고가 먼저 주어졌을 때에도 그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가 어떻게 그런 반응을 하게 되었을까요? 엘리가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한 번하시겠다면 하시는 분이니 내가 어떻게 해”라는 생각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주권 앞에 할 말이 없으니 그런 말을 한 것일 수 있습니다. 자식들을 가르쳐보았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아서 자포자기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든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엘리가 그런 비참한 사실을 자기가 데리고 있는 어린 사무엘의 입을 통해 듣게 되니 자존심이 상하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문제의 본질은 2:29 말씀대로 엘리가 자식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또 그가 눈이 어두워서 자녀들의 잘못을 직접보지 못했거나, 자식들의 잘못을 알면서도 자신의 나이와 쇠약함 때문에 개입할 도리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권위와 방법을 동원했어야 합니다. 또 자식들의 잘못에 분명하게 개입하지 않고, 아들들이 악행으로 가져온 고기를 즐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2:29, 4:18). 엘리의 이런 반응은 그의 성품과 분별력이 없는 것에다가 결정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으니 자식들도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한다고 해서 그저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하시겠지 하고, 손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성장한 자녀들 앞에서 부모들이 자주하는 실수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자녀에 대한 지친 마음 때문에 그런 자세를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질 테니 내가 어찌할 수 없지 않은가’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할 때,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대상에 대한 두려움과 자포자기를 한 심정 때문에 하나님께 떠맡기는 식으로 주권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를 오용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들에 대한 미움 때문에 잘 되었다는 식의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 옳지 못하게 여기시는 일들에 대하여 분명히 진노하고, 또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의지가 드러났을 때는 그 심판의 대상을 위해 마음 아파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혹시라도 용서하시거나 기회 주시길 바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입니다. 이미 대가를 치렀어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소돔을 위해 의인을 찾겠다고 하나님께 기회를 구하였습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죄 때문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 지적을 받고, 예고된 대로 아이가 죽는 심판이 내려진 상황에서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것처럼 말입니다. 또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가 될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 자기 죄의 대가를 치룬 상황, 하나님의 뜻이 변경될 수 없는 시간이 왔어도 회개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대가를 치루고 있거나, 치른 것 같으면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원망만 합니다.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세상에 대한 심판 경고 앞에서 우리는 마음을 찢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와 가까운 사람은 당연하고,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전도를 했을 때 거절한 사람을 속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 여기고 속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계획이고, 정해진 일이라 해도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 심판을 거두어 주시도록, 다시 기회를 주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우리의 잘못과 죄에 대하여, 심판만이 앞에 놓여 있는 주변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하여 우리는 슬피 울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셨던 것처럼 그러해야 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공통점 (사무엘상 5-6장) (0) | 2020.06.07 |
---|---|
이용하기 위한 믿음이 아닌 존중하기 위한 믿음 (사무엘상 4:1-22) (0) | 2020.05.31 |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 (사무엘상 2:12-36) (0) | 2020.05.17 |
변화의 주도자이신 불변의 하나님 (사무엘상 2:1-11) (0) | 2020.01.26 |
한나와 이스라엘 그리고 우리 (사무엘상 1:1-28) (0) | 2020.01.19 |